[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삶의 벼랑 끝에서 다시 일어서는 청년들의 치열한 여정을 담은 창작 뮤지컬 '조선의 복서'가 9월 9일 막을 올렸다. 창작 뮤지컬 '조선의 복서'는 제목만으로도 이미 강렬한 긴장감을 전한다. 경성 조선권투구락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단순히 '복싱'이라는 스포츠 장르극을 넘어, 청춘의 고뇌와 회복의 서사를 담아낸다.
'조선의 복서'의 무대는 1937년 경성 링 위에 선 두 청년 복서의 모습은 관객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무패의 복서 이화와 매번 패배를 거듭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는 신참 요한. 극은 정반대의 지점을 살아가는 두 청년이 권투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를 마주하며,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마주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공연장 무대의 링은 사실 단촐하다. 고정된 링이 아닌 장치를 이용해 무대의 링을 구현하지만 이 링은 단순히 두 사람이 주먹을 맞대는 공간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이 압축된 은유이다. '조선의 복서'는 두 캐릭터의 극명한 대비에서 오는 강한 몰입감이 특징이다. 차갑고 본능적인 생존력을 가진 무패의 복서 이화와 무모할 만큼의 긍정성을 가지며 끝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신참 요한. 두 인물은 대조적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오가는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패배를 두려워해 도망치는 삶, 그리고 패배 속에서도 버티는 삶.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극은 후자의 편에 다시 일어서는 몸짓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지난 25일 관람한 캐스트로는 이화 역 송유택, 요한 역 신은총, 마리아 역 류비, 장명 역 이한솔이 연기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자체로 이 작품의 설득력이었다. 이화 역의 송유택은 차갑고 무심한 듯한 태도 속에는 억눌린 상처가 스며 있었다. 요한 역의 신은총이 무대 위에서 보여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승부욕의 긍정 에너지는 단순히 연기 이상의 리얼리티를 느끼게 했다.
특히 요한이 연이어 패배하면서도 다시 링에 오르는 장면에서 '청춘'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떠올리게했다. 청춘은 승리의 기록집이 아니라,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반복의 기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
'조선의 복서'는 항일 서사를 정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흔히 강점기 배경의 작품들이 민족적 투쟁과 직접 연결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싸움에 집중한다. 이는 거대한 담론으로서의 민족이 아니라 매일을 버텨내는 작은 개인의 몸짓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그것이야말로 시대의 억압속에서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복서'는 규모 면에서 대극장 상업 뮤지컬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진 창작진, 젊은 배우들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을 더한 무대는 대학로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형 라이센스나 원작 IP 의존도를 벗어나 우리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실험적 창작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완성도에서 창작 초연으로서 미홉한 점도 있지만 작품은 패배하지 않는 법이 아니라 패배를 견디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몸짓 하나가 더 큰 울림을 주는 무대. 그 치열한 몸짓이 오래도록 관객들의 기억 속에 남아 또 다른 내일을 살아낼 힘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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