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은 2025년, 예술의전당이 일본 신국립극장과 공동 기획·제작한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용길이네 곱창집'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2008년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과 일본 신국립극장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양국이 공동 제작했던 작품은 초연 당시 한국과 일본의 주요 연극상을 휩쓴 화제작이었고, 이후 2011년 재연을 거쳐 14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시대 연극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제, 초연의 연출가이자 재일 한국인 2.5세 극작가 정의신이 다시 연출을 맡으며 더 깊어진 호흡과 시대적 질문으로 관객 앞에 돌아왔다.
연극으로 증명하는 '존재의 무게'
'야끼니꾸 드래곤'은 1970년대 일본 간사이 지방에 살던 한 재일 한국인 가족을 중심으로 한다. 공간은 늘 고기 굽는 연기와 냄새가 가득한 곱창집. 한국말과 간사이 사투리가 뒤섞이고, 숯불 위 곱창 타는 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지워지지 않는 일상의 배경음이 된다. 하지만 이 소란스러운 일상 속엔 거대한 역사와 삶의 균열이 스며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왼팔을 잃고, 한국전쟁에서 아내를 잃은 용길(이영석), 남편의 폭력에서 도망쳐 딸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한 영순(고수희), 사고로 다리를 다쳐 늘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지닌 시즈카(정수연), 다혈질이지만 책임감 깊은 리카(무라카와 에리), 가수를 꿈꾸는 철없는 막내 미카(정수연), 일본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지만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견뎌야 하는 토키오(키타노 히데키), 그리고 꿈과 현실 사이를 허우적대는 사위 테츠오(치바 테츠야)까지.
이 가족의 삶은 한없이 작은 일상 속에서 웃고 떠들다가도, 언제든 되풀이되는 차별과 가난, 불안정한 법적 지위, 북송 정책의 유혹 같은 거대한 폭력의 파도에 흔들리곤 한다. 그럼에도 극은 결코 비극의 무게를 과장하거나 신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질 듯 단단하고, 슬플 듯 웃음이 일며, 절망 속에서도 다시 봄이 오는 생의 리듬을 정교하고도 담담하게 포착한다.
이 담담함이야말로 '야끼니꾸 드래곤'을 시대를 넘어 공명하게 만드는 힘이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을 품고 있지만, 관객은 이 이야기 속에서 누구나의 가족을, 누구나의 고향을 발견하게 된다.
곱창집 ... 가장 낮은 곳에 피어난 '존엄의 자리'
연극의 배경이 하필 곱창집인 데에는 의미가 있다. 1970년대 일본에서 곱창은 버려지는 음식이었다. 재일 한국인과 가난한 일본 노동자들만이 먹었던, 일종의 '사회의 최하층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곱창집은 그들에게 노동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쉼터였고, 서로의 삶을 버텨내게 하는 공동체적 공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용길이네 곱창집은 단순한 직업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공동체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시린 역사 속에서 겨우 붙잡고 있던 삶의 온기였다.실제 곱창집을 옮겨놓은 듯한 무대는 현실감뿐 아니라 그 상징성을 극대화한다. 숟가락 소리, 연기, 간사이 사투리의 억양이 뒤섞이며, 관객은 마치 그 가족의 이웃이 된 듯한 몰입감을 얻게 된다.
국경을 넘어선 감정의 내공
이번 공연의 가장 큰 성취는 한국·일본 배우들이 보여주는 내밀한 감정의 조화다. 고수희의 영순은 초연 당시 일본에서 '요미우리연극대상 여자우수연기상'을 받을 만큼 이미 검증된 바 있다. 그가 다시 무대에 서자 영순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모성의 상징'을 넘어, 자신과 아이들의 삶을 위해 무수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여성으로서의 현실적 강인함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용길 역의 이영석은 무력한 역사 앞에서도 당당히 버티던 한 인간의 존엄, 그리고 가족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담백하면서도 묵직하게 전한다. 일본의 국민배우 치바 테츠야, 무라카와 에리, 키타노 히데키 등 일본 측 배우들의 호흡은 작품의 다국적 정서를 더욱 자연스럽게 완성한다. 특히 테츠오 역은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상실, 분노, 굴욕, 갈등,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정선을 폭발시키며 극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 테츠오가 시즈카 앞에서 억눌러 온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 속, 그의 절규는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역사에 짓눌린 '한 세대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서서히 파국으로 향하는 일상
극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비행기 소리'는 장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소리는 때로는 전쟁의 기억을, 때로는 북송선이 떠나는 항구를, 때로는 고향을 잃은 이들의 영영 닿을 수 없는 땅을 가리킨다. 비행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로 떠밀린다. 재개발 소문이 마을을 뒤흔드는 장면은 더욱 상징적이다.
함께 버텨 오던 공동체는 다시 흩어질 위기에 놓이고, 가족은 각자의 길로 밀려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에 계속 휘둘리는 이 가족의 모습은 현재 전 세계 난민과 이민자들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초연 당시보다 지금 이 작품이 더 절실히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다시, 세계 곳곳에서 고향을 잃고 떠도는 이들의 소식을 매일같이 접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 기억과 상실의 압도적 엔딩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다. 결국 강제 철거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 첫째 딸 시즈카는 테츠오와 함께 북조선으로, 둘째 딸 리카는 오일백과 함께 한국으로, 막내 딸 미카는 일본의 새로운 가정으로. 마지막으로 용길은 영순을 태운 리어카를 밀며 골목길을 힘겹게 오른다.
그 모습을 지붕 위 토키오가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벚꽃이, 눈처럼 흩날린다. 이 엔딩은 단순한 이별의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폭력 앞에서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고, 끝내 살아가야 했던 모든 이들의 '존엄한 퇴장'이다. 관객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먹먹함 속에서 역사가 사라지게 하려 했던 이들의 흔적을 오래도록 되새기게 된다.
2025년, 왜 다시 '야끼니꾸 드래곤'인가
지금 이 시대에 한국 관객에게 이 작품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K-콘텐츠 전성시대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지만, 정작 재일한국인의 역사와 존재는 양국 모두에게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그림자'였다.
이번 공연에 참여한 일본 배우들조차 재일교포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놓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화해를 말하기 전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 관계를 말하기 전에 공존의 조건을 묻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1970년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향을 잃고 떠도는 모든 난민들, 이민자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시대의 질문이기도 하다.
14년 만에 돌아온 '야끼니꾸 드래곤'은 ‘명작의 귀환’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만큼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작품은 단지 역사를 재현하는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연극이며, 상처를 직시하게 하고, 다시 사람을 믿게 하는 연극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잊어왔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 질문을 다시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야끼니꾸 드래곤'의 재공연은 지금 이 시대가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귀한 작품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