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조이(김시유)를 목욕시키는 아버지 제이크(배수빈) 제공 연극열전
아들 조이(김시유)를 목욕시키는 아버지 제이크(배수빈) 제공 연극열전

[아트코리아방송 =이용선 기자] 브래드 프레이저의 '킬 미 나우(Kill Me Now)'는 '죽음'과 '장애'라는 단어만으로도 관객에게 묵직한 선입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무대 위 이야기는 예상과 달리 무겁기만 한 비극이 아니다. 극은 삶의 끝자락과 존재의 조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분출되는 웃음과 애정, 그리고 인간적 갈망을 놓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은 눈물과 웃음을 번갈아 경험하며 무거운 주제와 친밀한 체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무대의 중심은 아버지 제이크와 아들 조이다. 제이크는 촉망받는 작가였으나, 아들 조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아버지다. 그는 헌신적이지만 동시에 분노와 피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의 헌신은 숭고한 동시에 피로와 상실을 동반한다. 작품 후반 병마가 찾아오며 그는 결국 돌보는 자에서 돌봄이 필요한 자로 전환되고 그 순간 무대는 관객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조이는 선천적 지체장애로 인해 늘 아버지의 보호 아래 살아왔지만, 이제는 독립과 자립을 갈망하는 17살 소년이다. 그는 성적 호기심, 또래와의 관계, 사랑에 대한 열망 등 모든 것이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힘겨운 벽에 부딪힌다. 그는 더 이상 보호받는 아이로 머물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의 병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허에 흔들린다. 제이크와 조이의 관계는 단순히 가족 드라마를 넘어 '누군가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 사이의 필연적 충돌을 압축한다. 특히 아버지의 병과 죽음 앞에서 조이가 느끼는 두려움과 혼란은 관객이 그를 더 이상 장애인 아들로 보지 않고 독립적인 주체로 바라보게 만든다.

 

연극 '킬 미 나우' 중 조이를 위해 제이크가 쓴 책을 가져온 로빈(전익령) 제공 연극열전
연극 '킬 미 나우' 중 조이를 위해 제이크가 쓴 책을 가져온 로빈(전익령) 제공 연극열전

로빈은 제이크의 연인으로서 극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때로는 현실적 선택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된다. 그는 단순히 가족을 지탱하는 조연이 아니라 제이크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며 동시에 현실의 잔혹한 선택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다. 그녀의 존재는 극 전체에 따뜻함과 인간적 균형을 부여한다.  트와일라는 오빠 제이크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하는 가족으로 때로는 오빠의 희생을 존중하면서도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을 제시한다. 조이에게는 친구이자 거울 같은 존재로 조이가 장애를 가진 소년이 아니라 평범한 10대로 살아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녀는 가족 내 갈등의 촉매이자 관객에게 외부적 시선을 제공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극의 핵심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비롯된다. 제이크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언제까지 돌볼 수 있을까'라는 한계와 두려움에 직면한다. 반면 조이는 보호를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부재가 남길 공허와 두려움에 괴로워한다. 이 갈등은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독립이라는 보편적 문제를 장애와 죽음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극대화한다. 제이크는 작가로서의 자아를 잃은 뒤, 이제는 아버지의 역할마저 위협받는다. 스스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면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가족 구성원들은 제이크의 병과 조이의 미래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한다. 사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적 문제들이 이들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결국 존엄한 죽음이라는 결론 앞에 설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연극 '킬 미 나우' 관람. 2025.06.26 사진  ⓒ아트코리아방송 이용선 기자​
연극 '킬 미 나우' 관람. 2025.06.26 사진 ⓒ아트코리아방송 이용선 기자​

이번 시즌 무대는 베테랑과 신예 배우들의 균형이 돋보였다. 지난 6월 26일 관람했던 날의 제이크 역의 배수빈은  아버지의 내적 균열을 그려냈고, 조이 역의 김시유는 17살 소년의 욕망과 불안을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특히 제이크와 조이의 긴밀한 호흡은 관객에게 리얼리티를 넘어 실제 부자(父子)를 바라보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여기에 로빈 역의 전익령은 사랑과 위로를, 트와일라 역의 김지혜는 냉철한 현실을, 라우디 역의 곽다인은 또래적 자립과 활력으로 이 세 인물은 제이크와 조이가 단순한 부자 관계의 대립 구도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인간적 스펙트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우리는 과연 인간다운 삶과 존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킬 미 나우'는 장애와 돌봄을 더 이상 희생과 극복의 미화로만 그리지 않는다. 돌보는 자도 돌봄을 받는 자도 욕망하고 분노하며 사랑하는 완전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관람 내내 관객은 인물들의 감정에 몰입하다가도 불현듯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부모와 자식, 돌봄과 독립, 그리고 언젠가 맞이할 죽음까지. 이 연극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따뜻하면서도 잔혹하게 들이민다.

 

연극 '킬 미 나우' 중 태블릿 피씨로 즐겁게 노는 라우디(곽다인)와 조이(김시유) 제공 연극열전
연극 '킬 미 나우' 중 태블릿 피씨로 즐겁게 노는 라우디(곽다인)와 조이(김시유) 제공 연극열전

'킬 미 나우'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돌봄 사회의 본질과 인간 존엄의 문제를 무대 위에 풀어낸 작품이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연극은 눈물과 웃음을 함께 건네며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실감하게 만드는 진한 체험이다. 관객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다 결국 자신과 가족의 삶, 그리고 언젠가 마주할 죽음을 성찰하게 된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연극 '킬 미 나우'는 비록 무대 위에서는 공연이 끝날지라도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관객들의 마음 속에 깊은 여운과 각자의 삶 속에서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에 대한 강한 고찰을 하게 되는 순간을 맞게 된다. 

 

한편 지난 8월 17일 서울 공연을 마친 연극 '킬 미 나우'는 입증된 작품성과 화제성을 안고 9월 13(토),14일(일) 양일간 성남아트리움에서 공연한다. 이번 무대는 단순한 투어가 아닌 작품의 보편적 메시지를 지역 관객과 나누는 첫 확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킬 미 나우'가 던지는 질문은 성남 공연에서도 깊은 울림을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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