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8일까지 대학로 극장 온
[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한국전쟁과 4·19 혁명 사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라진 개인들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창작 뮤지컬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가초연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관객의 마음 한가운데 던진다.
이 작품은 지난 2월 '무대를 빌려드립니다' 리딩 쇼케이스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기억과 인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평가 속에, 리딩 후 9개월간의 추가 개발 과정을 거쳐 이번 초연에서 서사적 완성도와 감정의 밀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역사의 그늘 속에서 피어난 개인의 기억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의 서사는 1961년 4월, 혁명의 열기로 들끓던 서울의 거리에서 시작된다. 대학생 우현은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그는 전쟁 중 흔적도 없이 사라진 큰형 희택의 흔적을 좇으며, 자신과 가족이 감춰온 과거의 진실과 마주한다. 그의 여정은 곧 국가 폭력과 사회적 침묵의 구조 속으로 이어지고, 관객은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집단의 역사와 교차하는지 목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 류인경은 양민 학살 유족회의 청년 학생 위원장으로, '왜 이들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인경은 냉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잊힌 자들의 이름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려는 시대의 양심이다. 그녀의 존재는 극의 중심을 이루는 윤리적 축으로, 진실을 향한 집요한 추적이 곧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한편 이윤섭은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온 세대의 상징이다. 그는 국가 권력의 논리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로, 전후 세대가 겪은 내면의 균열을 대변한다. 그의 노래는 결코 영웅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 회색의 목소리가 극을 현실로 단단히 붙잡아둔다. 이 세 인물의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엮인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이들의 대사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기억의 증언'으로 들린다.
'기억은 살아있는 현재다' ... 연출의 시선
작·연출을 맡은 배시현은 전작들에서도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기억을 정교하게 엮어내는 필치로 주목받아왔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개인의 기억으로부터 국가의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대담한 구조를 시도한다.
무대는 거대한 상징 장치 없이, 기억의 공간으로 설정된다. 철제 구조물과 오래된 목재, 희미한 조명으로 이루어진 무대는 어느 시대의 어느 폐허처럼 보인다. 그 위에 배우들이 서면, 공간은 곧 과거의 한순간으로 변주된다. 조명은 따뜻한 백색과 차가운 청색의 대비를 통해 기억의 온도를 시각화한다. 특히 전쟁의 잔해를 상징하는 붉은 빛이 무대 위로 스며드는 장면은 조르주 루스의 '빛의 원'을 연상시키듯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환기한다.
배시현은 극의 리듬을 느리게 가져가며, 서사적 긴장보다는 '기억의 여운'을 강조한다. 인물의 감정이 폭발하기보다 차분히 가라앉을 때 오히려 더 큰 울림이 발생한다. 이 절제된 연출은 '역사를 다시 쓰는 행위는 곧 애도의 과정'이라는 작품의 주제와 맞닿는다.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의 존재감
무대 위의 중심에는 임태현(우현 역)이 있다. 그는 한 청년의 순수한 분노와 절망, 그리고 그 감정의 변곡점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초반에는 다소 단정하고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형의 행방을 쫓아 진실에 다가설수록 목소리에 깊은 균열이 생긴다. 그의 마지막 독백 ? "나는 이제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는 객석을 숙연하게 하는 순간이다.
장보람(류인경 역)은 단단한 카리스마와 내면의 슬픔을 동시에 품은 연기로 극의 도덕적 중심을 세운다. 그녀의 넘버 '그들의 이름을 부르다'는 극 전체의 정서를 관통하는 명장면이다. 비탄 속에서도 단 한 번의 흔들림 없는 발성으로, 그녀는 잊힌 목소리들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다.
임강성(이윤섭 역)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연기로 무게감을 더한다.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해야 했던 세대의 상징으로, 작품의 현실성과 균형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류비(서주희 역)는 상처받은 가족의 고통과 모성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극의 정서를 따뜻하게 감싸는 역할을 한다. 전체 배우진은 대사보다 '정적과 호흡'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한다. 과장된 감정 연기보다, 무대 위 정지된 시선 한 줄기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기억을 잇는 무대 언어
작곡가 강철은 이 작품을 통해 클래식한 서정성과 현대적 긴장감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초반부의 넘버들은 단조의 피아노 선율 위에 단출한 현악기 편성이 얹히며, 전쟁 직후의 황량함을 표현한다. 중반부로 갈수록 리듬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합창의 형태로 정화된다.
특히 하이라이트 넘버 '이름 없는 약속들'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응축한다. 우현과 인경이 함께 부르는 이 곡은 '기억은 끝나지 않는다'는 선언처럼 울린다. 선율은 단순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관객의 감정이 점층적으로 고조된다.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단절과 재결합을 거듭하며, 서사적 구조와 긴밀히 연결된다. 넘버가 삽입되는 순간마다 조명과 무대 전환이 미세하게 호흡을 맞추어, 장면의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린다. '음악이 감정을 이끌고, 무대가 그것을 기억으로 고정한다'는 이 작품의 구조적 완성도는 특히 인상적이다.
무대디자인은 시간이 흐르는 폐허를 형상화한다. 변형 가능한 철제 프레임과 반투명 천을 이용한 장치들은, 조명에 따라 거리, 교실, 폐허 등으로 전환된다. 특히 인경이 유족들의 명단을 벽에 써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조명이 그 글씨를 하나씩 지워내며 '기억의 삭제'를 시각화한다. 조명감독은 색채 대신 명암을 중심으로 기억의 깊이를 표현한다. 어두운 무채색의 세계 속에서 순간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켜질 때마다, '기억의 파편'들이 살아난다. 이런 조형적 장치는 단순한 시각효과를 넘어, 작품의 철학적 메시지 '기억은 불완전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를 시각적 언어로 전달한다.
'기억의 연극' ... 오늘을 위한 질문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는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형식으로 쓰인 연극, 혹은 노래로 된 애도문에 가깝다. 작가와 연출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 스스로가 기억의 주체로 서도록 초대한다.
무대와 음악, 배우의 연기가 한 방향으로 정렬된 이번 초연은 한국 창작뮤지컬의 문법 안에서 '기억'이라는 주제를 예술적으로 탐구한 보기 드문 성취다. 다만 극의 초반부는 플롯의 전환이 다소 느리고, 인물 간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관객이 감정적으로 진입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중반 이후 내러티브가 응집되면서, 작품은 압도적인 감정적 밀도로 관객을 끌어안는다.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은 자극적인 전개나 화려한 장치 없이, 조용한 질문으로 관객을 붙잡는다. 그것은 "우리는 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억'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이 작품은 그 고통을 마주하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잊히지 않으려는 인간의 작은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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