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주)

[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2022년 초연 당시 '문학과 무대가 만난 모범 사례'라는 찬사를 받았던 창작 뮤지컬 '아몬드'가 3년 만에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손원평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 윤재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공감'이라는 주제를 깊이 탐구한다.

 

이번 2025년 재연은 단순한 재공연을 넘어 전면적인 개편과 재해석을 통해 초연의 장점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도 새로운 미학적 층위를 구축했다. 무대, 조명, 영상, 음악, 대본 등 모든 요소가 새롭게 다듬어졌고, 관객들의 반응 또한 뜨겁다. 대학로 NOL 유니플렉스 1관에서 9월 19일 막을 올린 이번 시즌은 '한층 더 깊어진 감성으로 돌아왔다'는 수식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며, 문학을 무대 위에서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뮤지컬 '아몬드'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소년 윤재의 성장기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관객들에게 '진정한 공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번 시즌에서도 작품의 중심 서사는 윤재가 상실과 고독을 통과하며 인간적인 감정을 조금씩 회복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윤소호, 도라 역 김이후).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윤소호, 도라 역 김이후). 제공 라이브(주)

초연의 성공, 그리고 재연의 도전

2022년 초연 당시 '아몬드'는 원작의 정서적 힘을 섬세한 대사와 음악으로 옮겨놓으며 관객 평점 9.5점을 기록했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감정의 파도라는 평가 속에 작품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킨 창작뮤지컬의 모범으로 꼽혔다. 하지만 이번 재연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새로운 시즌을 표방했다.

 

강병원 프로듀서, 김태형 연출, 이성준 작곡가, 서휘원 작가 등 초연의 주역들이 다시 모였지만, 그들의 목표는 '재현'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이번 시즌은 인물의 심리 묘사를 강화하고, 시각적·음향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객이 윤재의 감정 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듯한 몰입감을 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올해 연출의 방향은 '윤재의 결핍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초연이 인물 중심의 서정적 서사에 집중했다면, 재연은 감정의 결핍과 회복 과정을 시청각적 언어로 번역하며 감각의 층위를 확장했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주)

공간의 재구성: '헌책방'이라는 새로운 내면 공간

무대의 변화는 이번 시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별점이다. 초연의 무대가 비교적 상징적이고 단정한 구성으로 윤재의 내면을 표현했다면, 이번 재연은 윤재가 운영하는 헌책방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 공간으로 설정되었다.

 

목재 질감이 살아 있는 따뜻한 톤의 세트는 인물의 감정선을 포근하게 감싸며, 책이 쌓인 공간은 '윤재의 내면'을 상징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책 속 문장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공간으로 구현한 셈이다. 관객은 그 공간 속에서 윤재의 성장 과정을 읽어가는 독자가 된다.

 

또한 이번 시즌부터 새롭게 합류한 고동욱 영상디자이너의 LED 영상은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영상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윤재의 감각과 감정을 시각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윤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 변화가 영상의 색조와 움직임으로 표현되며, 시공간의 전환 또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예를 들어 윤재가 처음 '분노'라는 감정을 인식하는 장면에서는 화면 전체가 일렁이는 붉은 파동으로 채워지고, 도라와의 교감 장면에서는 따뜻한 금빛이 책방 전체를 감싸며 감정의 전이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관객들은 무대 위 공간이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변주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김리현, 도라 역 송영미).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김리현, 도라 역 송영미).제공 라이브(주)

감정의 파고를 세밀히 그리다

음악 또한 이번 재연에서 큰 폭으로 변화했다. 초연에서 작곡만 맡았던 이성준 작곡가가 이번엔 음악감독까지 겸임하며 전 넘버를 새롭게 편곡했다. 초연의 음악이 서정적 선율로 인물의 내면을 다소 거리감 있게 보여줬다면, 재연의 음악은 감정의 세밀한 흐름을 더 가까이 포착한다. 피아노와 스트링 중심의 편곡에 일렉트로닉 요소가 섞이며, 감정의 미묘한 진폭을 표현한다.

 

특히 윤재가 처음으로 타인의 슬픔을 마주하는 넘버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따뜻한 기타 스트로크로 변하며 감정의 '깨달음'을 음악적으로 묘사한다. 곤이의 분노를 표현하는 넘버는 강한 드럼 리듬과 불협화음을 활용해 폭발적 긴장감을 유도하고, 도라의 테마곡에서는 플루트와 하모니카가 섬세하게 어우러져 '감정의 순수성'을 상징한다.

 

조명 또한 한층 정교해졌다. 초연의 정적인 조명 디자인과 달리, 이번 시즌은 감정의 흐름에 따라 색감과 명암이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윤재의 무표정한 얼굴을 감싸는 푸른 조명은 '무감정'을 상징하고, 곤이와의 충돌 장면에서는 강렬한 붉은빛이 무대를 뒤덮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윤재가 '감정'을 느끼는 순간, 조명은 따뜻한 백색광으로 변하며 모든 색을 포용한다. 이는 윤재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느끼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완성하는 장면이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김리현, 도라 역 김이후, 엄마 역 이예지).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김리현, 도라 역 김이후, 엄마 역 이예지). 제공 라이브(주)

 윤재의 마음속 독자들

서휘원 작가의 대본은 초연보다 훨씬 응축되고 구조적으로 단단해졌다. 초연에서는 인물들의 심리를 세세하게 풀어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재연은 윤재의 시점에서 '기억과 회상'의 구조로 전환되었다.

 

특히 이번 시즌에서는 배우들이 단일 배역 외에도 복수의 인물을 소화하며, 윤재의 회고록을 읽는 '독자'의 역할로 등장한다. 이 장치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윤재를 대신해 그의 내면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관객은 무대를 바라보는 동시에, 윤재의 내면을 읽는 '또 다른 독자'가 된다.

 

12명에서 8명으로 축소된 캐스트 구성 역시 극의 응집력을 강화했다. 배우들이 여러 역할을 오가며 극 전체의 리듬을 조율하고, 윤재의 내면과 외부 세계가 교차하는 구조를 명확히 드러냈다. 덕분에 작품은 초연보다 훨씬 밀도 높은 정서적 흐름을 획득했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윤소호, 곤이 역 윤승우).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윤재 역 윤소호, 곤이 역 윤승우). 제공 라이브(주)

상실의 시작 ... 행복에서 절망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선천적 질환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를 가진 소년 윤재는 엄마와 할머니의 극진한 사랑 속에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그의 세계는 조용하면서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밤, 세 사람이 함께 외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비극이 닥친다.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진 '묻지마 범죄'로 인해 윤재의 엄마는 의식이 없는 체 입원하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윤재는 한순간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감정의 결핍 속에서조차 상실의 충격이 서서히 스며드는 이 장면은 작품의 정서를 결정짓는 출발점이자, 윤재가 세상과 맞닥뜨리게 되는 첫 번째 문이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윤재 앞에 같은 건물에 사는 심박사가 나타난다. 그는 빵집을 운영하며 윤재의 엄마가 운영하던 '지은이 책방'의 건물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 윤재는 단순한 세입자가 아닌, 인생의 제2장을 함께 써 내려갈 제자이자 보호 대상이다. 심박사는 윤재의 감정 결핍을 이해하며 강요하지 않는다. 그의 존재는 작품 속에서 '이해받는다는 것의 시작'을 상징한다. 감정은 느끼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윤재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은 윤재의 세계에 따뜻한 빛을 비춘다.

 

윤재의 고요한 일상에 균열을 내는 인물은 소년 곤이다. 어린 시절 납치와 입양, 파양, 소년원을 전전하며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가득 찬 소년. 그가 윤재의 삶에 뛰어들면서 작품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처음 만난 둘의 관계는 폭력과 충돌로 시작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곤이. 서로 정반대의 세계에 살던 두 소년은 상처의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외로움을 지니고 있다.

 

초반 곤이는 윤재를 괴롭히며 자신의 분노를 투사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서 진정한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윤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곤이는 그 안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순수함을 본다. 그리하여 폭력으로 시작된 관계는 서서히 교감으로 그리고 우정으로 변모한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곤이/윤이수 역 김건우).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곤이/윤이수 역 김건우). 제공 라이브(주)

'공감'이라는 기적

윤재는 곤이와 도라를 통해 처음으로 감정을 배우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계를 단단히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며,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의 미세한 흔적들이 스며든다. 그 감정이 진짜인지, 혹은 단지 모방된 감정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이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도라의 따뜻한 웃음, 곤이의 분노와 상처, 심박사의 조용한 위로가 윤재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며 그의 세상은 조금씩 색을 되찾는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윤재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변화를 맞는다. 엄마의 기적 같은 회복 소식이 전해지며, 완전히 무너졌던 그의 삶에 새로운 희망이 스며든다. 죽음과 상실로 닫혀 있던 윤재의 세계에 다시금 '사랑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작품은 비극의 끝을 단순한 절망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그의 앞날에는 여전히 많은 어둠이 남아 있지만, 그 어둠은 더 이상 절대적인 공허가 아니다. 엄마의 존재, 곤이의 우정, 도라의 웃음, 심박사의 조언이 얽혀 만들어낸 미세한 빛이 윤재의 세상에 희망의 결을 남긴다.

 

뮤지컬 '아몬드' 캐스트. 2025.10.07 사진 ⓒ아트코리아방송 이용선 기자
뮤지컬 '아몬드' 캐스트. 2025.10.07 사진 ⓒ아트코리아방송 이용선 기자

캐릭터의 심화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7일 관람한 캐스트를 보면 윤재 역에 문태유, 곤이 역에 김건우, 도라 역에 홍산하 배우가 열연했다. 문태유는 초연에 이어 다시 윤재를 연기하며, 감정의 부재 속에서도 인간의 따뜻함을 찾아가는 과정을 절제된 눈빛과 미묘한 호흡으로 표현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관객이 윤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곤이 역의 김건우는 다른 결을 지닌 분노를 보여줬다. 김건우는 내면의 응어리와 고독을 중심으로 곤이를 재구성했다. 김건우의 연기는 윤재와 곤이의 대립을 단순한 갈등이 아닌, 감정을 잃은 자와 감정에 휘둘리는 자의 대조로 승화시켰다. 도라 역의 홍산하는 작품의 온기를 담당하며, 감각적인 해석으로 도라의 자유로운 영혼을 새로운 색으로 덧입혔다.

 

이외에도 허순미, 이예지, 이형훈, 김보현, 김현기 등 조연진의 연기도 두드러졌다. 특히 할머니 역은 이번 시즌에서 윤재의 정서적 기반으로 비중이 강화되었으며, 배우들의 따뜻한 존재감이 작품의 감정적 균형을 잡아주었다.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주)
뮤지컬 '아몬드'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주)

 "감정의 파동이 전해지는 순간"

뮤지컬 '아몬드'의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곤이의 분노를 마주하고, 도라의 순수함을 보고, 심박사의 따뜻한 조언을 듣는 동안, 관객은 오히려 '감정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닿는다. 윤재의 변화는 크고 격렬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와 작은 행동의 차이는 수많은 감정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결국 '아몬드'는 감정의 회복을 이야기하면서도 감정의 '표현'보다 '이해'를 중심에 둔다. 이 작품이 관객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윤재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순간, 관객 또한 자신이 잊고 있던 공감의 감각을 되찾게 된다.

 

공연은 마지막 장면에서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윤재의 대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 위에 남겨진 그의 미소는 어쩌면 그 답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소년이 결국 '누군가의 감정'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 것처럼, 관객 또한 그와 함께 감정의 문을 조금이나마 열것이다. 그것이 바로 뮤지컬 '아몬드'가 남기는 가장 깊은 여운이자, 이 작품이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인간적인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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