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19세기 영국 하워스의 황량한 목사관에서 시작된 작은 목소리가 오늘날 대학로의 무대 위에서 록 음악의 격렬한 비트로 되살아났다.
소설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의 앤 브론테, 그리고 끝내 미완으로 남은 화가이자 시인 브랜웰 브론테. 우리가 '브론테'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들의 삶은 문학사의 별빛처럼 빛나지만, 동시에 가부장제·빈곤·질병·사회적 편견 속에서 끝내 좌절과 상처로 얼룩진 나날이기도 했다.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바로 이 '빛나지 못한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묻는다.
"그래서, 빛나지 못한 삶은 헛된 것일까?"
'웨이스티드'는 서사적으로 독특하다. 극은 샬롯 브론테가 목사의 아내, 즉 아서 니콜스 부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다큐멘터리 촬영에 응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동생들, 브랜웰·에밀리·앤과 재회하며 유년 시절로 돌아간다. 관객은 인터뷰라는 '현재의 시점'과 동생들의 기억이 교차하는 '과거의 회상'을 오가며, 다큐멘터리적 장치 속에서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브론테 남매의 삶을 따라간다. 이는 흔히 뮤지컬에서 기대하는 전통적인 드라마 구조와는 다르다. 영웅적 성취나 감동적인 성공담 대신, 실패와 좌절, 꿈의 좌초 과정을 기록하듯 담담히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다큐멘터리의 객관성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의 삶이 남긴 진실이다.
'웨이스티드'는 '새로운 뮤지컬의 지평을 연 작품'이라 평가할 만하다. 그 이유는 극이 위대한 업적이나 영웅적 성공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샬롯, 에밀리, 앤은 필명을 숨겨야 했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브랜웰은 끝내 예술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채 알코올과 좌절 속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관객들은 바로 그 실패와 좌절 속에서 더 깊은 울림을 경험한다.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 한 가족이 서로를 지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패한 예술가의 삶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의 갈망 앞에서 좌절하고도 다시 펜을 들었던 이들의 치열한 순간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단순히 브론테 남매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불안정한 노동, 성별에 따른 차별, 예술적 성취와 현실적 생계 사이의 갈등 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객 평가는 이를 증명한다. 초연 당시 관객들은 "실패를 낭비로 규정하지 않는 용기 있는 작품", "브론테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인간의 이야기를 만나고 큰 위로를 받았다"는 등의 호의적인 반응을 남겼다. 이런 호응을불러일으키는 힘은 '웨이스티드'가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적 실험이 선사하는 드라마틱한 긴장
이 작품의 백미는 음악이다. 브론테 남매가 겪는 감정의 진폭을 록의 여러 갈래가 고스란히 옮겨온다. 시대와 사회의 억압에 저항하는 순간 절망과 분노가 끓어오를 때는 메탈과 개러지 펑크의 질주가, 자매 간의 은밀한 속내와 고독을 나눌 때는 포크 록의 절제된 선율이, 꿈과 미래를 노래할 때는 팝 펑크의 밝은 리듬이 무대를 채운다. 관객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록의 질감 속에서 브론테 남매의 불안정한 삶과 흔들리는 심리를 생생하게 체험한다.이러한 다채로운 음악적 결은 단순한 장르의 나열이 아니라 극적 서사와 정교하게 맞물려 관객에게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뮤지컬 넘버들이 개별적 완성도를 넘어서 전체 극의 호흡과 맞물려 '하나의 록 콘서트' 같은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무대 위 네 명의 배우들은 높은 가창력과 록 보컬 특유의 거친 호흡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관객을 휘어잡는다. 폭발적이면서도 섬세한 음악의 결은 브론테 남매가 살았던 삶의 아이러니, 즉 '작지만 위대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운명을 선명히 드러낸다.
잘 짜여진 대본과 음악, 연출에 부합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16일 관람했던 날의 캐스트를 보면 샬롯 브론테 역 정연, 브랜웰 브론테 역 황순종, 에밀리 브론테 역 여은, 앤 브론테역 임예진이 이름을 올렸다.
정연은 초연에 이어 다시 샬롯을 맡으며, 이번 시즌에서 확연히 성숙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샬롯의 정체성 혼란과 자기 고백을 단순한 감정 과잉이 아니라, '작가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집요한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고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워풀한 가창은 록 사운드와 긴장감 있게 맞물리며, 샬롯의 내적 절규를 극대화했다. 황순종의 브랜웰은 좌절과 방황, 그리고 미완의 예술가로서의 초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그는 절제와 폭발 사이를 오가는 감정선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방탕과 불안정 속에서도 여전히 예술가적 자의식을 놓지 못하는 브랜웰의 초상을 무대 위에 생생히 구현했다. 특히 중저음의 밀도 있는 보컬은 브랜웰의 불안정한 삶에 깊이를 더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몰락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시대가 지워버린 예술가의 초상'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은은 에밀리라는 캐릭터가 가진 이중적 성격 '내면적 고독과 폭발적 상상력'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낸 배우다. 록 보컬의 폭발적인 성량과 제어된 감정선을 동시에 보여주며, 에밀리의 '격렬하면서도 신비로운 세계'를 사운드로 구현해냈다. 특히 '폭풍의 언덕'을 연상케 하는 장면에서 싸이키델릭 록의 리듬 위로 터져 나오는 그녀의 보컬은 단순히 음악적 기교를 넘어 한 예술가의 심연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다소 과장된 제스처가 몇몇 장면에서 산만함을 주긴 하지만 에밀리의 비범함을 무대 위에서 각인시켜준다. 임예진의 앤은 네 남매 중 가장 절제되고 현실적인 목소리를 들려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담백하고 진중한 태도로 극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 그녀는 록의 폭발적 에너지보다는 차분한 리듬과 절제된 톤으로 서사를 밀어붙이며, 앤이 지녔던 현실 인식과 냉철한 시선을 설득력 있게 전했다.
록과 뮤지컬의 접점이 주는 문화적 의의
'웨이스티드'는 한국 뮤지컬 무대에서 보기 드문 록 기반의 실험극이다. 기존 대극장 뮤지컬이 화려한 무대장치와 익숙한 멜로디를 앞세운다면, 이 작품은 음악적 불협화음과 장르적 혼종성을 통해 극의 주제를 직격한다. 또한, 브론테라는 세계문학의 거장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인간적 약점을 조명한 태도는 전기적 위인극을 넘어서는 현대적 해석이다.
뮤지컬 웨이스티드는 결국 이렇게 되묻는다. 브론테 남매는 시대와 사회가 부여한 굴레 속에서 끝내 찬란히 빛나지 못했지만, 그들의 치열한 발버둥과 실패조차도 오늘날 문학사와 예술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작품은 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고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외침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웨이스티드는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성공 신화 없이도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울림을 전한다. 음악과 서사, 다큐멘터리적 장치가 결합한 이 실험적 무대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를 증명하며, 나아가 예술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묵직하게 되새기게 한다.
10월 26일까지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웨이스티드'. 네 남매의 절박하면서도 치열한 외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대 위에서 다시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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