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을 기리며 돌아온 명작
- 9월 10일(수)~10월 4일(토) 소극장 산울림
[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가 산울림 40주년을 맞아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번 공연은 연극계 원로 임영웅 연출의 유작 성격을 짙게 지닌다.
1985년 산울림 개관 기념 공연이자 한국 연극사에서 부조리극의 정수를 각인시킨 작품이기에 이번 무대는 단순한 재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 2019년 명동예술극장 공연 이후 6년 만의 귀환이자, 임영웅 선생 1주기를 추모하는 헌정 무대이기도 하다.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1막 시연 이후 기자간담회에는 예술감독 임수현, 연출 심재찬, 배우 이호성, 박상종, 정나진, 문성복, 문다원이 참석했다.
프레스콜 현장에서 연출을 맡은 심재찬은 "이번 연출은 제 해석이라기보다 임 선생님의 연출을 최대한 충실히 이어가는 작업"이라며 "다만 지금의 관객과 세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하며 작은 변화를 모색했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부조리극'으로 불리던 베케트의 텍스트가 "사실은 오히려 리얼리즘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해석하며, 각 세대가 자신만의 현실을 반영해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심재찬 연출은 1987년 조연출로 작품에 참여한 기억을 떠올리며 "리얼리즘 연출가였던 임영웅 선생이 부조리극을 놀이의 형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에 크게 놀랐다"고 전했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도 "배우들이 자기 나름의 통찰을 자유롭게 드러내되, 텍스트의 긴장과 놀이성을 함께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덧붙였다.
극 중 블라디미르 역의 이호성은 1990년대부터 30년 넘게 '고도' 무대에 서 온 산증인이다. 그는 "이 작품은 제 인생의 지침서와 같다. 1994년 처음 접한 이후 가치관, 사회관, 인생관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라며 "베케트가 제 삶을 계몽시켰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고도는 누구에게나 다르다. 누군가에겐 사랑일 수 있고, 자유일 수도 있으며, 맛있는 한 끼 식사일 수도 있다.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명작의 힘"임을 강조했다.
포조 역의 박상종 역시 2005년부터 무대에 올라온 베테랑이다. 그는 이번 공연을 "산울림 40주년이자 임영웅 선생 추모 무대"라 명명하며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면 꾸짖으실까, 흐뭇해하실까 늘 생각하며 무대에 선다"고 소회를 밝혔다.
박상종은 "외국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고독과 침묵이 두드러졌지만, 우리 무대는 그 침묵 사이를 놀이로 풀어낸다"며 "한국적 놀이 개념이 더해져 단절과 고독을 다시 놀이로 환원하는 방식이 우리 공연만의 독창성"이라고 강조했다.
배우 정나진은 반복되는 기다림과 시작을 강조하며 "연극이 끝나면 다시 다른 무대를 기다리는 배우의 삶처럼, 인간은 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 끝없는 반복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새롭게 합류한 문성국은 럭키 역을 맡았다. 그는 친아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감을 밝히며 "심 선생님과는 '만선'이라는 작품을 함께 했습니다. 이번에 또 배역을 주셔서 정말럭키비키하고요. 전통의 산울림에서 세계적인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를 지금 매일매일 저의 인생 작품으로만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제 인생작이 된 이유는 가족과 함께 같은 무대를 밟기 때문"이라며 감격을 드러냈다. 소년 역에 오른 아들 문다원은 "세계적인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 행운"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특히 이번 무대는 임영웅 연출 특유의 디테일이 고스란히 재현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심재찬은 "임 선생님의 연출은 '자로 잰 듯하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시선 하나까지도 철저히 계산되어 있어 조연출들이 가장 힘들어했습니다"라며 웃었다. 이호성 역시 "세 발짝 반, 45도 시선 같은 세세한 지시 덕분에 배우들은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번 공연 역시 그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도전"이라고 전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파리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해석된 현대 연극 가운데 하나다.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호성은 "교도소 공연 사례처럼 관객 각자에게 고도는 달라요. 어떤 이에게는 빵, 어떤 이에게는 여행, 또 다른 이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 역시 그 질문을 다시금 관객 앞에 던진다. 심 연출은 "세대별로 다르게 읽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힘"이라며 "불확실성과 반복, 기다림의 무게가 오늘의 관객에게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임수현 예술감독은 "2019년 영동예술극장에서의 공연 이후 연출가 임영웅 선생님 건강 문제로 중단됐지만, 올해가 산울림 40주년이자 1985년 개관 기념작이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올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출가는 부재하지만 작품 해석과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심재찬 연출이 있고, 이호성·박상종·정나진 등 오랜 시간 함께한 배우들이 있어 산울림판 고도의 정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라며 "선생님 1주기를 기리며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산울림 40주년을 기념한 이번 '고도를 기다리며'는 단순한 재연이 아니다. 임영웅 연출의 숨결을 이어받으면서도 현재의 배우들이 쌓아온 시간과 경험이 보태진 일종의 집합적 해석이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고도는 과연 오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관객 각자의 마음속 고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무대, 그것이야말로 베케트가 남긴 연극의 궁극적 힘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