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이용선 기자] 2025년 11월 6일, 서울 용산구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작가 래리 피트먼(Larry Pittman)은 자신의 두 연작 'Caprichos'(2015)와 'Nocturne'(2015)을 중심으로 회화 세계의 궤적을 풀어냈다.
7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발히 작업하며, '여전히 아날로그 도구로, 혼자서 그림을 그린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기술이 주류가 된 시대에 순수 수공의 회화를 고집하는 그의 태도는, 단순한 고전주의적 제스처가 아니라 세계와 이미지의 관계를 근본에서 다시 묻는 실천처럼 보인다.
1952년생인 피트먼은 콜롬비아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남미에서 보냈다. 11살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이후, 그는 남·북미 문화가 교차하는 도시의 다층적 감각을 흡수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색채와 미국 서부의 대중문화, 그리고 멕시코 시티를 자주 오가며 얻은 시각적 영감은 그의 화면 전반에 스며 있다. 1980년대 이후 LA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 잡은 그는, 장식적이고 공예적인 미학, 지역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회화적으로 탐구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아왔다.
고야와 디킨슨의 병치, 폭력과 시의 공존
이번 전시는 피트먼이 2015년에 완성한 두 연작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그중 하나인 'Caprichos' 시리즈는 18세기 스페인 화가 고야(Francisco Goya)의 판화집 'Los Caprichos'에서 출발한다. 고야가 당시 사회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을 풍자적으로 고발했던 것처럼, 피트먼 역시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과 인간의 내면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그의 'Caprichos'는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를 화면에 병치하며, 언어와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대화를 시도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듯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고야의 사회비판적 판화와 디킨슨의 내밀한 시어는 전혀 다른 결로 보이지만, 피트먼은 그 사이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끌어낸다. 두 인물 모두 개인적 윤리와 존재의식, 그리고 사회적 폭력에 맞선 예술가로서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통한다.
고야의 그림자 위에서 ... 'Capricho #2'의 비극과 시적 은유
'Caprichos' 연작 중에서도 'Capricho #2'(2015)는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전남미술관이 올해 초 구입해 소장하게 된 이 작품은, 고통과 구원의 경계에서 인간 존재의 실존적 물음을 던진다. 화면 중앙에는 교수형을 당한 인물이 부유하듯 매달려 있다. 그러나 피트먼의 붓은 잔혹함을 드러내기보다, 상징과 색채의 층을 통해 그 죽음을 '보는 행위' 자체를 묻는다.
그림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가 함께 쓰여 있다. 시인은 고통을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노래했고, 피트먼은 그 언어를 이미지로 번역한다. 그는 "때로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 너무 커서 신체적 감각을 넘어선다"고 말하며, 인간의 내면적 고통이 사회적 폭력과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병치된 이 작품에서 시구는 교수형의 인물과 직접 연결되지 않지만, 서로를 울림의 파장 속에서 감싼다. 피트먼은 이를 "같은 사실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두 층의 은유"라고 정의한다. 관객은 그 교차점에서 하나의 총체적 메시지를 스스로 조립해야 한다.
'Capricho #2'의 색감은 전통적인 종교화의 명암 대비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현대적 색면의 조형감으로 전환된다. 인물의 주변을 감싸는 붉은 기운과 푸른 그림자는 생명과 죽음, 현실과 초월을 동시에 암시한다. 피트먼에게 있어 회화는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감각과 사유가 동시에 작동하는 '비유의 언어'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한국의 전시 공간에 자리하게 된 것을 "특히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적 맥락이 다르더라도 인간의 감정과 역사적 상처는 보편적으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Capricho #2'는 서구의 종교적 이미지와 남미의 색채, 그리고 현대 사회의 폭력 구조가 한 화면 안에서 겹쳐진 복합적 회화다.
이처럼 'Capricho #2'는 피트먼 회화 세계의 핵심을 응축한다. 사회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은유와 상징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연민을 드러낸다. 회화적 장식성과 철저한 사유가 만나는 지점, 바로 거기서 피트먼의 정치적 회화는 완성된다.
어둠 속의 별빛, 에밀리 디킨슨과 함께한 저항의 시학
'Capricho #8, 2015'는 래피 피트먼의 'Caprichos'의 시리즈 중에서도 사회적 의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에서 한 구절을 발췌해 회화의 중심 텍스트로 삼은 것으로, 피트먼은 "1862년경 쓰인 디킨슨의 시를 바탕으로, 남북전쟁의 비극과 그 속에서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회화적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디킨슨을 "위대한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의 전형이자 무신론자, 자유사상가"라고 정의하며 "그녀의 언어는 단순히 시대의 여성적 목소리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내면적 저항을 상징하는 보편적 시학"이라고 강조했다.
작품 속 시구는 '그들이 별처럼 하늘에서 떨어졌다'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피트먼은 "이는 전장에서 죽어간 이들을 향한 디킨슨의 비가이며, 동시에 인간이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폭력의 굴레를 은유하는 구절"이라 밝혔다. 'Capricho #8'의 화면에는 무덤의 형태와 별의 잔광이 교차한다. 그는 "이미지의 중심은 무덤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죽음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처럼, 사라져간 존재들의 흔적이 남긴 빛의 잔상"이라 말했다.
작품의 색채는 강렬하면서도 침잠되어 있으며, 전면에 배치된 텍스트는 회화적 질감과 겹겹이 얽혀 있다. 피트먼은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둘은 병렬적 구조를 이루며, 관객이 해석의 경계를 오가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피트먼은 "남북전쟁 당시 미국 사회의 혼란과 분열을 바라본 디킨슨의 시는, 지금의 세계가 처한 정치적 긴장과 놀라우리만큼 닮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이날 간담회에서 "10년 전 완성한 작품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덧붙였다.
"지금 우리는 다시금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파시스트 대통령을 경험했고, 남미나 인도 등지에서도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죠. 그 현실이 너무도 익숙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날 피트먼은 "저는 여전히 스튜디오에서 혼자 작업합니다. 디지털 도구나 보조 시스템은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100% 손으로, 물리적 재료로 작업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피트먼에게 회화적 노동은 사유의 방식이며, 저항의 형식이다.
밤의 호흡과 내면의 언어 ... 'Nocturne #9'이 보여주는 존재의 변주
'Nocturne #9'(2015)는 전작 'Caprichos' 연작과 거의 동시에 제작된 시리즈이지만, 그 분위기는 극명하게 다르다. 피트먼이 직접 밝힌 대로, 카프리초스 작업 중 탈진을 느끼던 시기에 병행하며 만들어진 작품이다.
'녹턴(Nocturne)'이 원래 야상곡을 뜻하지만, 피트먼에게 그것은 음악적 형식이 아닌 시간의 감각, 곧 '밤이라는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작가는 "해 질 무렵, 인간이 하루의 피로를 내려놓고 다시 호흡하는 시간"을 상상하며 이 연작을 구상했다고 한다.
'Capricho #2'가 사회적 폭력과 인간의 고통을 직시했다면, 'Nocturne #9'은 그 반대편에서 자유와 내면적 일탈의 시간을 탐구한다. 낮의 시간, 곧 '육체와 노동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밤의 어둠 속에서 잠시나마 무중력 상태로 떠오르는 자아의 형상을 포착한다. 피트먼은 "밤은 우리가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시간"이라 말하며, 이를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Nocturne #9'에는 피트먼 특유의 장식성과 리듬이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것은 외향적 서사보다 내면의 언어로 전환된다. 그는 "카프리초스가 외향적이고 선형적이라면, 녹턴은 훨씬 더 내적인 언어에 가깝다"고 말한다. 실제로 작품 속 문양과 기호는 더 부드럽고 유기적인 형태를 띠며, 사색적 정서를 자아낸다.
'밤의 언어'라는 주제는 그가 언급한 '스테이머(staymer)' 부모를 뜻하는 단어로도 확장된다. 피트먼은 이 언어가 "어느 문화권에서나 비슷한 어감을 가지는 원초적 단어"라 말하며, 이를 인간 보편의 내면적 언어, 즉 존재의 원형적 울음에 비유한다.
'Nocturne #9'은 그래서 단순히 '밤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가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정신적 황혼의 초상이며, 작가가 회화를 통해 '숨'을 되찾는 과정이다. 고요하고 로맨틱하지만, 그 내면에는 여전히 고통의 잔향이 흐른다. 피트먼은 그 두 세계를 동시에 끌어안으며, 어둠 속에서 빛을, 침묵 속에서 언어를 찾는다.
과거의 회화, 현재의 질문
기자간담회에서는 "왜 2025년의 지금, 2015년 작을 다시 꺼내는가"라는 질문도 나왔다. 이에 피트먼은 "오늘날의 혼란과 내면적 피로, 그리고 정체성의 혼돈이 이 작품들 속 주제와 다시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SNS와 AI, 그리고 전 지구적 연결망 속에서 끊임없이 '내면의 구매'를 반복한다"며, 현대인의 정신적 피로를 언급했다. 'Capricho'의 폭력과 'Nocturne'의 회복, 이 두 축은 결국 오늘날 인간이 겪는 '정신적 진자운동'의 은유다.
그는 또 "과거의 작품이 새로운 시대에 다시 순환하는 현상'에 대해 언급했다. 피트먼은 최근 한국 미술계가 김환기 등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재평가하는 흐름을 언급하며 "수십 년 전의 회화가 오늘날에도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이 '시간을 견딘 언어'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Capricho #2'와 'Nocturne #9'은 바로 그 '시간을 견딘 언어'의 예다. 사회적 풍자와 내면적 시성이 공존하는 화면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현재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간담회의 마지막에서 피트먼은 "관객에게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상징(symbol)은 닫힌 체계이지만, 은유(metaphor)는 열려 있습니다. 제 작품이 정해진 의미 대신, 각자의 문화와 경험 속에서 다르게 읽히길 바랍니다."
이는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태도이자, 그의 회화가 지닌 철학적 기반이다. 작품 속 주사위나 도미노, 사선의 선들은 구체적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생각이 흐르는 길'을 그려내는 시각적 문장이다. 피트먼의 회화는 그래서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히고 사유되는 회화다. 그것은 상징이 아니라 언어의 가능성, 질서가 아니라 감각의 유연성, 폭력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여러분이 제 작품을 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졌으면 합니다. 기존의 상징이 아닌,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그것이 바로 예술이 줄 수 있는 가장 유동적인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래리 피트먼은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 미술의 흐름 속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해왔다. 그의 작업은 사회·정치적 이슈를 기반으로 한 초기 회화에서 출발해, 이후 점차 내면과 형식, 감정과 구조의 균형을 탐구하는 회화로 진화했다.
'카프리초스와 야상곡'은 그 진화의 정점에서, 회화를 감정과 사유의 매개체로 재정의한다. 그의 화면은 말없이 노래한다. 밤의 적막 속에서 울리는 색채의 울림, 상징의 리듬, 문학의 메아리가 서로를 감싸며 관객의 감각을 흔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고야와 디킨슨, 그리고 피트먼 자신이 구축한 거대한 서사적 공간 '폭력의 역사와 재생의 희망이 공존하는 회화적 우주'를 마주하게 된다.
'카프리초스와 야상곡'은 단순한 회화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밤이라는 은유로 기록된, 인간 존재의 서사적 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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