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가나아트센터(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는 9월 26일(금)부터 10월 26일(일)까지 총 31일간 중국 하얼빈 출신의 조선족 작가 류봉식(劉鋒植, Liu Fengzhi, 1964–2017)의 국내 첫 개인전 'Echoes of Silence'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집약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로, 2000년부터 타계 직전인 2017년까지의 대표작들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된다.
수많은 중국 현대작가들이 상업예술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던 시기에도 류봉식은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놓지 않았다. 그는 천안문 광장과 기념비, 가족의 신체와 일상의 사물을 소재로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맥락이 교차하는 장면을 담아냈다. 그의 화면에는 굽이치고 뒤틀린 선, 반복적인 붓질, 기호적 이미지들이 등장하며, 이는 단순한 형식적 실험이 아닌 내면 깊은 불안과 상처의 기록이었다.
류봉식은 체제 안에서 규율화된 예술 교육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속의 ‘여백’에서 자유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후 하얼빈사범대학교에서 인체와 형태를 탐구하며 표현의 가능성을 넓혔고, 졸업 후에도 제도적 틀을 거부한 채 ‘무제도성’과 ‘반구조성’을 바탕으로 작업을 전개했다. 그의 회화는 완결된 구조보다 감정과 내용을 우선시하며, 일기처럼 솔직하고 미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특징이다.
1990년대 이후 그의 작업 중심에는 천안문과 기념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 집단 속에서 소멸된 개인과 시대의 상처를 드러내는 심리적 공간이었다. 그는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고 단순한 기호로 재구성했으며,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비행기’는 자유와 불안을 동시에 상징했다. 어린 시절 연을 날리던 기억에서 비롯된 이 모티프는 하늘을 향한 열망과 더불어 현실의 긴장을 환기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류봉식의 회화는 증판즈, 장하운 등 동시대 중국 작가들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지만, 은유와 상징을 통해 내면의 불안과 침묵을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시대의 반영을 넘어, 인간 존재의 존엄과 기억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술적 증언으로 남았다.
이번 전시에는 류봉식 특유의 거칠고 자유로운 붓질, 단순화된 기호적 형상을 통해 강렬한 긴장감을 전하는 대표작 《Sun》이 출품된다. 검은 바탕 위에 흑백의 대비와 붉은 선이 뒤엉키며 폭발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재조립된 천안문과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현실과 기억, 추상과 재현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 작품은 빛과 어둠, 생성과 파괴가 공존하는 풍경으로, 인간 내면의 불안과 시대적 정서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Echoes of Silence'는 류봉식이 평생 탐구해온 개인과 사회,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디지털 이미지가 범람하는 오늘날에도 그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술은 어떻게 인간의 삶을 기록하고, 잊힌 목소리를 되살릴 수 있는가. 이번 전시는 사라진 목소리와 남겨진 기억을 불러내는 류봉식의 회화적 언어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