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과 정지 사이의 풍경을 회화로 증발시키다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페로탕 홍콩은 영국계 미국인 화가 에마 웹스터(Emma Webster)의 아시아 첫 개인전 '증기(Vapors)'를 2025년 3월 25일부터 5월 17일까지 개최한다. 로스앤젤레스 화재의 참화를 겪으며 제작된 신작 11점이 공개되는 이번 전시는, 기후 재난과 그 여파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을 담은 몽환적인 풍경화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에마 웹스터, 페로탕 홍콩 개인전 '증기'-에마 웹스터
에마 웹스터, 페로탕 홍콩 개인전 '증기'-에마 웹스터

웹스터는 LA 인근 퍼시픽 팰리세이즈의 화마 속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감각을 회화로 치환했다. 화면 위에 펼쳐진 고요하면서도 불안한 풍경은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서, 인류의 파괴적 문명과 그로 인한 상실, 정체된 일상 속 무력함을 묘사하는 감성적 풍경으로 탈바꿈한다.

전시 제목인 ‘증기(Vapors)’는 물리적이면서도 은유적인 복합 의미를 담고 있다. 기온과 대기, 날씨 등 외부 환경의 변화를 가시화하는 자연 현상이자, 인간 내면의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오래된 표현이다. 웹스터의 그림은 이러한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녹여내며, 희미한 회색빛과 유려한 붓질, 구름처럼 퍼지는 색의 번짐을 통해 감각적으로 응축된 풍경을 완성한다.

웹스터는 “세상이 불타는 와중에도 삶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일상이 계속되었다”고 회상한다. 팬데믹 시기의 무력감, 자연 재앙 속에서도 반복되는 삶의 진부함이 그녀의 작업에 정서적 밀도를 더한다. 그녀의 회화는 가상현실과 실제 자연, 그리고 인간의 심리 풍경이 교차하는 새로운 회화적 장르로 평가받고 있다.

에마 웹스터, 페로탕 홍콩 개인전 '증기'-페로탕 홍콩
에마 웹스터, 페로탕 홍콩 개인전 '증기'-페로탕 홍콩

웹스터는 16세기부터 발전해 온 풍경화의 전통을 반추하면서도 이를 완전히 뒤틀고 재조합한다. 과거에는 인간의 행위를 위한 배경으로 존재했던 자연이, 이제는 인간의 착취와 개입으로 인해 파괴되고 변형된 상태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작가는 실제 자연을 관찰하기보다, 3D 소프트웨어와 가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든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다. 이로써 자연은 회화적 상상의 결과물로 거듭나고, 회화는 인류가 만들어낸 세상을 되비추는 또 다른 ‘시뮬라크르’가 된다.

이번 전시작들은 기존의 정물화와 풍경화를 연결하면서도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텅 빈 언덕, 사라진 나무, 그림자조차 애매한 구조물들. 관람객은 이 낯설고 침묵에 가까운 풍경을 통해 묵시록적 현실의 여운과, 마주한 재난 앞에서의 인간 감정의 결을 체험하게 된다.

에마 웹스터의 '증기'는 자연의 멸실과 감정의 중력 상실이 중첩된 풍경을 통해, 기후 위기 시대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한다. 회화는 더 이상 아름다운 자연을 그려내는 수단이 아니라, 인류의 흔적과 그것이 초래한 파편을 기록하는 매체가 된다. 웹스터는 이 전시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풍경과 감정,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세계의 불확실성을 시각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페로탕 홍콩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웹스터 회화 세계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동시대 회화가 직면한 생태적 질문에 대한 진중한 응답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연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의 증발을 암시하는 듯한 이 회화적 '증기'는 오늘의 불안을 응시하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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