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 미학산책] 경험과 구성의 다양성 Ⅲ
‘사실만이 중요하다. 실지왕(失地王) 존이 여기를 통과했다. 이것은 감탄해야 할 일이며, 내가 온 세계의 모든 이론을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실재가 거기에 있다’. 이것은 역사가의 말이다. 물리학자라면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실지왕 존이 여기를 통과했다. 그러한 일은 나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다. 그가 다시 여기를 통과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 Henri Poincaré, La Science et I'Hypothése(Paris,1902), chap. 9. p.168(앙리 포앙카레 『과학과 가설』河野伊三郞譯, 岩波文庫, 171쪽)
이 간결한 표현에서 사실성의 두 가지 방법적 원의(原義)의 대립을 인정한다. 공간 내의 어떤 특정한 지점과 시간 내의 특정한 순간으로 결부시키고 있는 개별적인 사건을 물리학자가 기술하는 경우에도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개별성이 아니라 개별성의 반복 가능성을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확정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생기(生起)의 제반 조건이다. 즉, 질문은 이렇게 된다.
‘이것들의 제반 조건이 견지(堅持)되고 있으면 같은 사건이 다른 장소와 다른 시점에 있어서도 관찰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의 제반 조건이 특정한 변화에 따라 어떻게 바뀔 것인가’라고.
그렇게 보면 개별적 사실이 탐구되어 조사될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목표로 삼고 있는 고찰은 이 사실뿐만 아니라 그것에 따라 되풀이된다고 생각되는 규칙이다. 이 규칙의 형식은 당장은 미정이지만 이 형식에 대해서 성급하게 명백한 말로 표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전에 물리학에 있어서 마치 이 형식이 궁극적인 확정을 보인 시대가 있었다. 헬름홀츠(Helmholtz)는 기초적인 논문 『힘의 보존에 대해서』(1847년)의 서문에서 일반적 인과율을 물리학적 사고의 근본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 인과율이야말로 자연과학적 문제 설정의 불가결 조건(conditio sine qua non) 즉, 자연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물리학의 판단을 바탕으로 하면 인식비판 또한 이 것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하고 억제한 듯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모든 자연의 해명이 필연적으로 어떤 특정한 타입의 인과법칙에 다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의 해명은 단순한 확률법칙으로 만족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것에 어떻게 결착(決着)이 붙여지는 것이라고 해도, 사고의 유무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결재(決裁)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결착을 낼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물리학의 개념적 질서 구조에 침잠(沈潛)하는 것에 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연과학적 사고의 내부에서 순수하게 동력학적인 합법칙성의 영역 이, 단지 통계적인 합법칙성이 타당한 영역에서 구별될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Max Planck, Dynamische und statische Gesetzmigkeit, Berlin 1914 참조〉
그러나 물리학적 사고가 어떤 사건을 엄밀하게 인과적으로 파악하려고 요구하지 않고, 통계적 규칙을 수립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역시 사고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항상 사건의 규칙적인 면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이 규칙성을 확인하는 판단은 결코 개별 사례에 관한 말로 표현하는 단순한 총화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물론 엄밀한 경험론은 근본 경향에 따라 이러한 해소를 시도하는 것은 틀림없다.
예를 들면, 마하(Mach)에 있어서는 낙하 법칙을 수립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로 통합시켜 보아도 공통의 언어 표현에 있어서 변화 이상의 변화를 받을 일도 없는 다수의 구체적인 개별 관측을 한데 모은다는 이외의 의미는 지탱하지 못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갈릴레이(Galiei) 낙하 법칙의 형식 s=gt2/2는, 낙하거리(s)의 특정한 개별치 낙하 시간(t)이 특정한 개별 값이 대응하게 하는 일람표의 단축표기라고 밖에 간주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