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아래 잠재한 불안, 전통적 여성 역할의 억압을 독창적 회화로 드러내다
전시 기간: 2025년 10월 21일 ~ 12월 20일
장소: 에스더 쉬퍼 파리(16 Place Vendôme)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파리 방돔광장에 자리한 에스더 쉬퍼 갤러리에서 폴란드 작가 카롤리나 야블론스카의 개인전 ‘Jarred Kitchen’이 2025년 10월 21일 ~ 12월 20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겉으로는 소박한 부엌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성의 몸과 감정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억압되고 통제되는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카롤리나 자블론스카-핸즈 인 더 더트, 2025-캔버스에 유채-100 x 100cm-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카롤리나 자블론스카-핸즈 인 더 더트, 2025-캔버스에 유채-100 x 100cm-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작가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보냈던 부엌의 기억, 그리고 땅을 일구며 살아온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회화로 끌어온다. 전시 제목 ‘Jarred Kitchen’은 유리병에 음식을 저장한다는 뜻을 넘어, 자신이 갇혀 있다는 감정적 상태를 함께 가리킨다. 야블론스카는 이 이중적 의미를 한 화면에 병치하며, 부엌이라는 사적 공간이 어떻게 여성의 역할과 노동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왔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카롤리나 자블론스카-계란 제조기, 2025-캔버스에 유채-140 x 120cm-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카롤리나 자블론스카-계란 제조기, 2025-캔버스에 유채-140 x 120cm-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그녀의 회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작가 자신의 모습에서 출발하지만, 더 이상 개인이 아니다. 눈알, 손가락, 머리카락처럼 신체 조각이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여성의 몸이 사회적 시선 아래 어떻게 해체되고 규정되는지를 드러낸다. 어떤 작품에서는 잘린 머리가 접시 위에 올려져 있고, 어떤 장면에서는 여자가 불에 탄 상태로 부엌 가구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상적 공간 속에서 여성의 감정과 몸이 어떻게 묶여왔는지, 작가는 숨김없이 말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침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리병 안에 갇힌 손이 관람자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억압의 일상 속에서도 분명하게 존재하는 저항의 기운이 있다. 눈을 감고 순응하는 인물과, 눈을 크게 뜨고 반항처럼 응시하는 인물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 야블론스카는 이 같은 대비를 통해 전통적 여성 역할이 만들어낸 압박과 그것을 깨고 나오려는 내적 힘을 함께 보여준다.

카롤리나 자블론스카-양파 그림, 2025-캔버스에 유채-140 x 120cm-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카롤리나 자블론스카-양파 그림, 2025-캔버스에 유채-140 x 120cm-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부엌은 더 이상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다. 작가에게 그것은 여성들이 수십 년간 감정과 노동을 묻어둔 공간이며, 동시에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해 온 정신적 장소다. 야블론스카는 이곳에서 기억, 억압, 생존, 유머, 저항을 모두 꺼내어 화면 위에 엮는다. 그녀의 회화는 일상을 살면서도 늘 내면 어디엔가 남아 있는 불안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자, 여전히 변화하지 않은 여성의 현실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고발하는 방식이다.

카롤리나 자블론스카-우먼 온 파이어, 2025-캔버스에 유채-180 x 150cm -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카롤리나 자블론스카-우먼 온 파이어, 2025-캔버스에 유채-180 x 150cm -사진제공 파리 에스더 쉬퍼 갤러리

이번 파리 전시는 야블론스카의 직설적이고 대담한 회화 언어가 여전히 유효하며, 여성의 몸과 감정, 그리고 전통적 역할을 둘러싼 오래된 구조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겉으로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그 안에 숨겨둔 감정의 층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강한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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