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그러면서 허망한-정상곤 개인전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제가 그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것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정직하게 그립니다”(조너스 우드)

1. 정상곤은 자신의 작업실 인근에 자리한 대지산(大地山)을 산책하면서 접한 풍경을 그렸다. 산의 내부로 곧바로 직진한 시선 속에 부분적으로 걷잡힌 나무와 덤불 숲이 바닥과 함께 어질하게 밀려온다. 빠르고 격정적인 붓질과 중화된 색채의 더미 속에 풍경은 출렁이고 화면은 흔들린다. 

풍경_Terre Verte 45x45cm oil on canvas 2021(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풍경_Terre Verte 45x45cm oil on canvas 2021(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그것들은 두서없이 모여든 나뭇가지와 풀들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리듬감을 추적해나간 동선이다. 특정 장소가 뿜어내는 현장감을 그림의 즉흥성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가는 가능한 의미와 해석을 거부하고 물질과 체험의 차원에서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산책길에서 접한 자연, 생명체에서 자신을 흔드는 어떤 경험을 한듯하다. 언어나 문자가 멈춰선, 그것들을 불구화시키는 ‘시적인 순간’이 그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강타하는 무언가를, 모든 일상적인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아찔한 경험과 인상을, 순수 자명한 세계가 아닌 불가해하고 불투명한 세계로서 체득한 자연을, 동시에 인문화된 시선으로 읽어내는 풍경에 대한 단상을 그는 가능한 새롭고 신선한 풍경화, 이른바 풍경화의 장르적 클리세를 극복해나가는 풍경화를 시도한다. 

Still Life 71x71cm oil on canvas 2024(2023)-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Still Life 71x71cm oil on canvas 2024(2023)-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그것은 개념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물질적 교감이나 반응, 몸으로 감각될 수 있는 현실과 사물의 세계를 포착할 방법을 찾는 일이자 기존 풍경의 해석과는 결이 다른 지점의 모색으로 보인다. 작가는 개념보다는 다소 애매모호한 감각, 감성의 구현을 앞세운다. 자연은 선험적인 지식이자 정보에 의해 포착할 수 없다. 불가해한 저 풍경과 대면한 나라는 몸, 살을 통한 감각의 구현이 그림이 된다. 이는 대상의 재현이 아닌 공간 속에서 지각되는 사물의 모습을 표현하는 일이자 행위를 통해 지각했던 끊임없이 유동하는 공간을 떠내는 일이기도 하다.

봄-낙화 60.5x73cm oil on canvas 2025-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봄-낙화 60.5x73cm oil on canvas 2025-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2. 작가는 자연을 관조하는 입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대상에 밀착된 시선은 보는 이들의 눈앞에 그것들이 현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안긴다. 그림에는 나무와 풀이 들어섰지만 실은 사계절의 빛과 색채에 겨냥되어 있다. 화면에는 특정한 대상이 자리하는 동시에 그것을 그려나갔던 여러 흔적이

자욱하니 올라오면서 바탕 면과 물감층과 붓질의 흔적, 여러 선들의 교차를 숨이 가쁘게 보여준다. 

꿈틀대는 붓질과 예리한 선들이 어지럽게 횡단하는데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것 같다. 이른바 획에 가깝고 작가의 감각, 감성을 실어나르는 흔적이기도 하다. 모든 자국은 특정한 움직임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 자국은 자신이 본 것을 옮겨 놓은 흔적이자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인상과 감정을 포착하려는 자취, 보고 느낀 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시도의 몸짓, 붓질에 다름아니다. 자연이 안기는 운율을 날카롭고 예리한 붓질로 기록하는 이 그림에서 새삼 동양화에서 접하는 필력과 세를 만난다. 

봄의 질주 53x41cm oil on canvas 2024-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봄의 질주 53x41cm oil on canvas 2024-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붓을 다루는 모든 그림은 결국 생동하는 붓질, 대상의 본질을 추려내는 붓질에 겨냥된다. 무엇보다도 나무줄기들이 예리하고 날카로운 선들은 춤을 추듯이 뻗어나가면서 기운생동하는 어느 활약상을 그려 보인다. 아울러 그는 제한된 몇 가지 색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려 한다. 의도적인 한계 내에서 또 다른 표현의 장을 도모하는 이 작업은 색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색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한편 구체적인 대상이 들어오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질료로 환원되어 흩어진다. 동시에 물질들이 모여 여전히 외부세계를 연상시키는 흔적을 안겨준다. 구상과 추상이 뒤섞이고 이미지와 질료가 혼재된 이 풍경은 어느 사이로 좁혀들어간다. 2차원의 평면을 환기시키면서도 동시에 그 평면을 활성화시켜서 동적으로, 생성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풍경_Terre Verte 45x45cm oil on canvas 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풍경_Terre Verte 45x45cm oil on canvas 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3. 부분적으로 절취된, 세계에서 뜯겨나온 이 풍경은 나무와 풀만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대지산의 특정한 장소에서 추출한 풍경은 작가에게 인상적으로 본 그 무엇이다. 그러나 정상곤이 그린 것, 재현한 것은 특정 대상의 외양이 아니라 그로부터 촉발된 자기 내부의 온갖 것들이다. 나를 둘러싼 외부세계는 그만큼 미지의 것이자 낯선 타자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름 지을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이 대상, 자연이다. 자연은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 역시 지극히 신비스런 영역이다. 

따라서 자연을 모방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작가들은 그 자연이 회임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와 무수한 색에 절망한다. 그 절망과 도전 사이에 그림은 존재한다. 정상곤의 그림 역시 그 선상에서 떨고 있다. 이 그림은 실제 풍경을 대면하고서 그 풍경 앞에서 그 정령과 혼을 자기 몸으로 흡입해낸 자의 체득 안에서 가능한 어느 그림이다. 길고 가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풀 등은 흔들린다. 세상은 고정시킬 수 없고 생성 중이며 운동 중이다. 기후와 온도, 바람과 대기의 변화 속에서 시간의 격렬한 흐름 속에서 자연은 매 순간 격하게 변화를 거듭한다. 작가는 나무의 살아있는 상태와 힘의 동세와 생성 중인 시간을 그리고자 한다. 

풍경_Terre Verte 45x45cm oil on canvas  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풍경_Terre Verte 45x45cm oil on canvas  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자연의 형태

는 동적 상태다. 그러니까 “생성과정이고 또한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론은 변형론”이라고 그는 말한다. 수시로 떨어대는 세계를 고정된 화면 안에 온전히 응고시킬 수 없다. 화가는 그 흐름과 운동을, 기운을 더듬어 다시 보여준다. 정상곤의 풍경화란 자연/생명체의 미세한 기운, 호흡, 감촉, 섬세한 주름까지도 잡아내고 이를 형상화하려는 지난 한 시도에 해당한다. 

사물/자연에서 인격적 풍모를 느끼는 이 애니미즘 체험은 ‘이 세상을 무(無)로 돌리지 않으려는 지성의 장치’(베르그송)에 해당한다. 무기적인 사물에 자기를 투영하여 보는 것이 바로 애니미즘 지각인 것이다. 작가는 “유난히 붉거나 검은 흙에서 나온 풀들, 그 사이에 흩어진 자연은 수시로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영원히 불변한다. 이 모순을 지닌 자연은 인간에게 중요한 생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은 돌멩이 사이사이에 우리들의 살과 피가 먼지가 되어 스며있다. 

새, 혹은 새처럼 30x30cm oil on canvas 2024(2020)-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새, 혹은 새처럼 30x30cm oil on canvas 2024(2020)-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우리들의 삶과 영혼이 스며있는 것”(작가노트)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그의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독해하게 한다. 가시적이지 않지만 땅과 풀과 나무에 스며있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체적이자 추상적일 수 있는 이 땅의 역사적 사건들이 풍경의 징후로 나타날 수 있는 어느 지점을 찾고 있다. 자연을 그것들이 육화된 존재로 읽어내는 것, 인문적 시선이 투과한 풍경의 몸을 그리는 것이다. 4. 자연을 수시로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영원히 불변한다. 

 봄의 질주 30x30cm oil on canvas 2021(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봄의 질주 30x30cm oil on canvas 2021(2019)-사진제공 성남 운중화랑

이 모순을 지닌 자연은 인간에게 중요한 생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배우고 깨닫는다. 한 유한한 인간의 삶의 비루함과 누추함이 자연 앞에서 치유 받는 것이다.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넘어가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산포시킨다.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쉬지 않고 옮아간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형태를 만들고 부수며 소멸시키고 다시 생성시킨다. 인간은 그 같은 자연의 생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반추한다.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의 유한한 생을 은밀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과 생명체들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정상곤의 그림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대단한 힘으로 서 있지만 동시에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다름아닌 풍경에 대한 모종의 연민 의식, 그러니까 소멸, 사라짐, 우연성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자 모든 생명체에 바치는 애도일 것이다. 그의 말처럼 자연은 “얼마나 찬란하고 또 허망한가.”

저작권자 © 아트코리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