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로스앤젤레스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도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충돌하며,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 얽히고 풀리는 거대한 유기체 같다. UCLA 해머 미술관의 대표적 비엔날레 시리즈인 ‘메이드 인 LA(Made in LA 2025)’는 바로 그 불협화음의 에너지 위에서 탄생했다. 이번 전시는 도시의 질서를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질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도시가 스스로 말하도록 두는 것”을 택했다. 큐레이터 에센스 하든과 폴리나 포보차가 제목조차 붙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시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낸 ‘무제의 미학’
하든과 포보차는 로스앤젤레스를 하나의 거대한 ‘진동체’로 본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와 조각, 영상, 안무, 사운드 등 28명의 작가가 참여하며, 각자의 언어로 이 도시의 불안과 환희, 리듬과 소음을 이야기한다. 2012년 첫 회를 시작으로 이어져 온 ‘Made in LA’ 시리즈는 이제 단순한 지역 비엔날레를 넘어, 세계 미술계가 로스앤젤레스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이번 2025년 에디션은 특히 “질서보다 감정, 구조보다 경험”에 집중한다. 작가들은 현실의 틀을 해체하며, 각자의 세계를 낯설게 재구성한다.
그중에서도 다섯 명의 작가는 이 도시의 복잡한 층위를 예술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1. 팻 오닐-빛과 기계의 기억을 조각하는 노장
1939년생 팻 오닐은 LA 예술계의 산증인이다. 할리우드 특수효과의 개척자이자 실험영화의 거장으로, 그는 영화와 조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술이 낳은 감각의 시대”를 예술로 기록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1960~70년대 조각들은 자동차 산업과 도시 문명의 욕망을 상징한다. 유리섬유와 자동차 페인트로 만든 작품들은 산업의 찬란함과 그 이면의 쇠락을 동시에 드러낸다. 노란 원통 위의 초록색 피클 형상, 그리고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붉은 색의 흔적은 생생한 도시의 단면이자, 인간의 욕망이 남긴 잔상처럼 보인다.
2. 가브리엘라 루이스- 몽환의 색, 놀이의 서사
가브리엘라 루이스의 작품은 현실보다 꿈에 가깝다. 그녀의 세계는 디즈니랜드와 카니발, 1990년대 뮤직비디오, 그리고 멕시코 이민자 가정의 기억이 뒤섞인 하나의 ‘감각적 혼합물’이다.
그녀는 패션을 “방패이자 무대”로 활용하며,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정체성을 보호한다. 원색의 방, 빛나는 천, 그리고 과장된 제스처가 반복되는 퍼포먼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꾸며야만 살아남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본다. 루이스의 예술은 ‘자아의 가면극’이다.
3. 칼 쳉-미래의 유물, 시간의 프로토타입
칼 쳉의 작업은 실험과 발명, 그리고 관찰로 이루어진 거대한 실험실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키트, 장치, 운동적 구조물을 통해 인간과 기계, 환경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그의 작품은 마치 과학자의 노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과 두려움”이 담겨 있다. 쳉은 자신을 미래의 고고학자로 상상한다. 그의 오브제들은 ‘기술문명의 잔해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의 예고편’이다.
4. 알리 에얄-전쟁 이후, 기억의 파편으로 그린 초상
이라크 출신의 알리 에얄은 가장 젊지만, 가장 무거운 서사를 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전쟁 이후의 세계, 그 잿더미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상실을 ‘기억의 충돌’로 그린다. 그의 회화는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 시간의 흔적들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을 잃은 기억은 형태를 잃고 번져나가며, 화면 위에서 꿈처럼 재조합된다. 에얄의 작업은 개인의 트라우마를 넘어, 전쟁 이후의 세계가 품은 ‘집단적 상흔’의 시각적 증언이다.
5. 크리스티 럭-내면의 일기장을 그림으로 바꾸다
크리스티 럭의 예술은 ‘침묵의 고백’이다. 어린 시절, 동생이 허락 없이 읽은 일기장에서 비롯된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단어 대신 이미지를 그리게 만들었다.
그의 회화는 직관적이며, 달콤쌉싸름한 감정의 층위를 품는다. LA의 공기,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말하지 못한 기억들이 천천히 스며든다. 완결되지 않은 듯한 화면은 “예술은 끝나지 않은 감정의 기록”임을 상기시킨다.
예술, 도시의 언어로 말하다
‘Made in LA 2025’는 단순한 지역 비엔날레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 그 자체를 전시하는” 프로젝트다. 이름 없는 이번 전시는 제목보다 더 강렬한 서사를 품는다.
각 작가들은 자신의 언어로 LA의 불협화음을 연주하며, 도시의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이 전시는 2025년 10월 9일부터 2026년 3월 1일까지 해머 미술관에서 열린다.
그곳에서 우리는 도시의 무질서를 예술의 질서로 바꾸는 순간-‘환영의 순간(The Moment of Illusion)’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