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와 문화적 동반의식-한 화가의 예지력이 문화창달의 서광으로 빛나
朴明仁(미술평론가·명예고문)
서양미술이 도입된 것은 150년에 불가하다. 조선말기 일본으로 유학했던 선지자(先知者)들에 의해 시작된 서양미술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일전(日展)에 출품하다가 거부당하면서 선전(鮮展)을 창립하게 되면서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미술발전에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면서 선전은 유명무실해졌고, 6·25사변이 일어나면서 미술계는 전지적(前志的)인 화가들의 뜻은 펼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두건 화백은 급변하는 세계 추세에 대한민국에서도 서양미술이 확산되어야 한다는 현실감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내일을 바라보는 선견지명으로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이형회이다.
나는 장두건 화백 평론을 쓰면서, 그리고 이형회 취재로 신문에 글을 쓰면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때 장두선 화백은 서양미술이 자리잡기도 전에 미국으로부터 밀려들어 온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와 유럽에서 밀려 온 앵포르멜(Informel)에 의해 급변하는 현실을 생각하면서 단체명을 추상미술은 구상미술과 다른 모양이란 점에서 이형회(異形會)라고 명명했지만, 다를 異자를 사용하여 오해의 소지가 많다고 해서 써 以자로 수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 목적은 異에 있었다. 구상미술이 전체를 차지하는 가운데 추상미술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장두선 화백은 이미 일본에서 세계적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던 터라 추상이나 구상이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한 결과가 처음부터 이형회상을 제정했을 때도 추상회화에서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앞서가는 선지적인 예지였다.
장두건 화백은 말하기를, “작가의 무한한 표현세계, 개성있는 회화세계를 추구함에 있어서 벽이 있을 수 없고 유파에 인위적인 선이 그려질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여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구애받지 않고, 작품의 질과 회화성을 중요시하여 가치를 부여하는” 이념을 이형회의 특성으로 하고 진취적인 플랫폼(Platform)으로 삼았다. 이러한 장두건 회백의 뜻에 의해 이형회는 언제나 밝은 내일을 맞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많은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가장 오래된 백양회 등이 중단되었고 가장 오래된 후소회가 있지만 후소회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들 단체였다가 고령화되어 직계 제자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직계 제자까지도 하나하나 몰하면서 이제는 공모전 회원을 증가시키면서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은호 화백의 취지는 사라지고 일반단체와 같아졌다. 70년이 넘은 오랜 단체들도 친목단체가 되어버렸고, 어떠한 단체도 이형회와 같은 명분과 이념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단체가 친목으로 일관되고 있지만 이형회만은 장두건 화백의 창립의지와 목적성 플랫폼으로 유지되는 단체인 것이다.
이번 포항의 포스코갤러리 기획초대전은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장두건 화백의 탄생지가 포항이라는 사실에 기인해야 하고, 위대한 화가의 탄생이 지역 문화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포항 포스코갤러리 초대전의 컨셉이 사사무은(師事無隱)이라는 점에 주지해야 한다. 사사는 스승으로 섬긴다는 의미이고 無隱은 사전에도 없는 조어인데 숨기지 않는다는 직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명칭을 정한 권숙자 회장은 “스승으로 모시는 태도에서 권위를 존중하되 질문과 비판이 늘 열려 있는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좋은 의미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장두건 화백에게 사사받은 적이 없으면서 장두건 화백을 스승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비난의 소지가 있는 것이고, 장두건 화백의 화업과 업적을 거울삼아 스승같이 대한다는 의미는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 나 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내가 배울 점이 있어서 스승이나 다름없다. 이형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가면서 크나 큰 업적을 남긴 장두건 화백을 존중하고 스승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은 이형회의 앞 날에 밝은 서광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 카네기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포스코가 있다. 카네기는 방직공, 배달원을 거치며 성장하였지만 “열의를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그의 신조는 철강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미국 최대 철강회사로 부상하면서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뉴욕최대공연장인 카네기홀을 세우고, 카네기공과대학을 세웠는가 하면, 카네기 재단을 세워 교육진흥과 문화사업에 지원하다 84세에 생애를 마감했다.
포스코 또한 다르지 않다. 박태준 선생과 함께 한국경제개발 5개년에 철강산업을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산업발전에 핵심적으로 기여했고, 기술개발, AI, IT, 탄소중립지원,생태계보존을 위한 ESG활동, 로드킬방지시스템으로 야생동물보호 등 많은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나 문화사업이 결여되어 있다가 문화사업지원책의 일환으로 포항의 예술인 장두건 화백의 업적을 기리면서 이형회를 초대전람회를 하게 되었다. 이 또한 포항지역의 문화발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교두보가 강한 의지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사업이란 언제나 생산성, 수익성이 없기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기업 윤리를 실천하는 것 외에도 회사의 문화적 이미지까지 높일 수 있어 홍보 전략의 수단으로도 유리하다. 포스코갤러리의 이번 전람회는 포스코의 이미지를 높이 상승시킬 것이고 기업의 메세나(Mecenat)로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는 계기적 활동으로 메디치가의 명성처럼 포스코의 명성이 세계에 떨칠 것이고,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기업 윤리를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문화적 이미지 쇄신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따라서 장두건 화백을 스승처럼 섬기는 이형회 일원은 포항을, 그리고 포스코를 문화적 동반의식의 가치를 높이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번 계기로 어느 대기업처럼 문화사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포스코만의 문화사업으로 발전적 확장이 명성을 드높일 것으로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