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신화와 인형의 조형, 비스크가 만든 새로운 장면
[아트코리아방송 = 지유영 기자] 인사동에서는 2025년 9월 17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도자기 인형전시 ‘The Bollm’은 비스크(bisque) 도자 인형과 구체관절인형(BJD)의 조형언어를 꽃의 상징과 서사로 엮어낸 기획전이다. 현장에서 만난 참여 작가 이해리는 자신의 작업과 함께 동료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또렷하게 짚어주었다. 요지는 단순하다. “꽃과 탄생, 그리고 신화.” 이 명료한 축 위에 재료·의상·설치·조명의 세부가 촘촘히 올라탄다.
[전시의 관점] 고가 수집품을 전시장 밖으로 끌어내다
이해리는 “해외 네임밸류 있는 작가의 비스크 인형은 수억 원대로 거래된다”고 선을 그었다. 고급 수집품의 영역이던 장르를 이번 전시에서는 오브제화·조명화·소품화로 스펙트럼을 넓혔다. 대형·고가작만이 아니라 소비자 접근성을 고려한 소형 비스크 작품군을 병치해 관람과 구매의 진입장벽을 낮춘 점이 기획의 핵심이다.
[이해리의 바다: ‘비너스’와 ‘눈물’의 변주]
이해리의 대표작은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의 재해석이다. 바다 거품이 솟는 순간의 비가시적 감각, 사랑스러움과 생동을 비스크 표면의 질감과 볼륨으로 밀어올렸다. 흉상 형식의 오브제 연작은 ‘경국지색(양귀비)’처럼 식물의 페르소나를 인물 장신구로 번역한다. 14K 소재와 실제 보석(루비)을 적용하고, 자석 방식으로 액세서리를 탈부착할 수 있게 설계해 전시·연출의 가변성을 확보했다.
‘아프로디테의 눈물’은 바람꽃(아네모네) 전설을 소환한다. 비스크의 미세한 표면을 이용해 눈물의 미광(微光)을 조형화했다. 채색을 최소화하고 도자 재질 자체의 매력을 전면에 내세운 무채색 작업 역시 소재 이해도가 만든 긴장이다.
[이한나: 오키프 이후, 사막의 생명학]
이한나는 조지아 오키프가 남긴 사막의 해골·꽃 상징을 비스크 인형 문법으로 치환한다. 호랑나리, 제비꽃 등 ‘탄생화’ 모티프가 도자 채색과 관절 분할(자연스러운 포즈 구현)을 통해 생장한다. 매끈한 미장(米狀) 질감 위에 올린 색의 농담이 회화적 장면을 만든다.
[윤보현: 대형 비스크의 품격과 신부·해바라기 서사]
윤보현은 약 67cm급 대형 비스크를 통해 스케일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은방울꽃’ 신부 이미지는 순결의 상징을 인체 조형과 레이스·베일 디테일로 구체화했고, ‘해바라기의 전설’은 의상·머리장식을 전부 수작업으로 제작해 서정과 장엄함을 동시에 잡았다.
[이상미: 램프-인형 콜라보, 한국적 미감의 접속]
이상미는 램프 구조를 인형에 결합해 빛을 매개로 한 생활조형을 제안한다. 한복의 선과 능소화의 이야기가 조명과 만나면서 인형이 ‘작동하는 오브제’로 전환된다. 유일한 남자 인형 ‘바다 같은 소년’은 청록의 눈과 연약한 꽃잎 소품으로 감수성을 밀도 있게 올린다.
[김바로: 기억의 꽃, 서사의 피부]
김바로는 비스크 인형을 단순 장식이 아닌 “디스플레이 가능한 서사”로 전환한다. 무광택 표면과 제한된 채색의 대비를 활용해 피부 같은 질감을 구현하고, 리본·베일·꽃잎 같은 소품을 최소 단위의 이야기 장치로 배치한다. 관절 구조는 포즈의 변화보다 시선과 손 제스처를 고정하는 방식으로 감정의 밀도를 높인다. 테이블톱 스케일과 흉상 오브제를 병치해 가정 공간에서도 작품이 독립적인 서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했으며, 조명과 그림자를 적극 활용해 관람자가 작품과 함께 시간의 층위를 읽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김바로의 작품은 꽃의 신화와 인형의 조형미를 응축해 일상의 한 장면에 서사적 무게를 부여한다.
[설치 작가: 티벳, 초원, 야크—부유하는 대지]
티벳 전통 의상과 야크를 결합한 설치는 초원의 단면을 공중에 띄우는 방식으로 장면을 만든다. 바닥이 아닌 공중에서 인형과 환경이 결합될 때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서사 전체’를 읽는다. 전시의 메인 축을 구성하는 이유다.
[꽃의 언어로 묶인 서사들]
카라의 순수, 수국의 아련함(오필리아의 잔상), 성탄의 기적(청년기의 예수 이미지), ‘엄지공주’의 동심 등 이해리의 서사는 문학·종교·신화를 가로지른다. 눈물, 베일, 관 모티브 같은 미세한 소품은 감정의 단서를 제공하고, 관절 분할과 의상 구조는 이 단서를 ‘포즈’로 등가 교환한다. 이 전시가 ‘The Bollm’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꽃(볼룸의 어감과 중첩되는)과 탄생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지점이다.
[재료와 기술: 왜 비스크인가]
비스크/도자: 무광택의 미세한 기공이 미세표정과 빛의 번짐을 정직하게 받는다.
관절 구조: 포즈의 자연스러움이 감정의 설득력으로 직결된다.
의상·장신구: 수작업 의상, 금속 가공, 보석 세팅, 자석 구조—장르를 공예·주얼리·패션으로 확장.
조명·설치: 램프·부유 설치·배치로 관람 동선을 연출한다.
[관람 포인트 6]
탄생화 아이콘: 은방울꽃·제비꽃·호랑나리·수국·아네모네·해바라기.
눈물 디테일: 표면에 스며든 미세 채색과 유광 포인트.
흉상 오브제: 가정용 디스플레이를 상정한 스케일과 균형.
금속·보석 사용: 재료의 급을 바꾸는 선택—값과 품의 근거.
조명 결합 작품: 램프형 인형의 생활조형 가능성.
설치의 공간성: 공중 디스플레이가 만드는 시선의 상승.
[정리] 시장성과 서사의 균형
‘The Bollm’은 수집가 전유의 고급 장르를 대중의 시야로 끌어내면서도, 꽃의 신화라는 보편적 상징으로 서사를 확장했다. 고가·대형과 소형·오브제 라인을 함께 제시한 전략은 현명하다. 결정적으로, 이 전시는 비스크 인형이 여전히 조형 예술의 현재형임을 증명한다. 재료는 과거의 것이지만, 연출은 지금의 언어다.
전시 정보
행사명 The Bollm – 도자기 인형전시회
기간 2025년 9월 17일(수) – 9월 30일(화)
참여 이해리, 이한나, 윤보현, 이상미, 김바로
도자 인형은 오래된 미감의 그릇이고, 꽃의 신화는 반복되는 탄생의 문장이다. ‘The Bollm’은 그 두 세계를 서로의 언어로 번역해, 인형을 장식에서 서사로 되돌려놓는다. 이번 전시는 그 정확한 순간을 기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