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빙하미술관이 오는 9월 27일부터 내년 3월 29일까지 공식 개관 전 특별전시 ‘Beyond Black: Light, Time, Memory(블랙을 넘어: 빛, 시간 그리고 기억)’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알도 탐벨리니(Aldo Tambellini, 1930–2020)를 중심으로, 태국의 카민 르차이프라싯(Kamin Lertchaiprasert)과 한국의 이이남(Lee Lee Nam)의 작품을 함께 조명하며, 빛과 시간, 기억이라는 주제를 동시대적 감각으로 풀어낸다.
알도 탐벨리니- ‘블랙’의 철학과 전위적 실험
탐벨리니는 실험영화,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전반을 아우르며 매체의 경계를 확장한 전위적 예술가다. 그가 평생 탐구한 색채의 총합인 ‘블랙’은 단순한 색을 넘어 인간 정신과 기술 문명의 진화를 관통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제시된다.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로 그의 방대한 작업세계를 한자리에 모아 드로잉,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급진적 실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입구에 설치된 ‘루마그램(Lumagram)’에서 대형 벽면을 가득 메운 ‘비디오그램(Videogram)’까지 이어지는 전시장은 빛, 소리, 영상이 뒤섞이는 탐벨리니의 실험정신을 생생히 전달한다. 특히 유작이자 대표작인 《We are the Primitives of a New Era》는 현대 기술문명이 열어가는 새로운 ‘원시 시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문명 속에서도 인간 본성과 창의성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카민 르차이프라싯-명상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하다
태국 작가 카민 르차이프라싯은 불교 철학과 명상에서 영감을 받아 삶과 죽음을 사유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의 《After Death Before Next Birth》는 언리얼 엔진과 공간 오디오 기술을 결합해 관람객을 몰입형 환경 속으로 이끈다. 그는 관객이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직접 체험하며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도록 안내한다. 수행적 태도를 바탕으로 한 그의 예술은 단순한 감상이 아닌 깊은 내적 체험으로 확장된다.
이이남-기억과 역사, 디지털로 다시 태어나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전통 회화와 현대적 감각을 연결한다. '꿈속의 광주'에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보쉬의 '쾌락의 정원'을 결합해 5·18 민주항쟁을 초현실적 풍경으로 재해석했다. 이 작품은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시각적 우화로 풀어내며 관객이 공감과 성찰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또한 대형 설치작품 '시가 된 폭포(Waterfall turned into a poem)'에서는 5,300여 권의 고서에서 추출한 문자가 흰 포말처럼 쏟아져 내려 문자와 이미지, 시간과 기억이 하나의 장대한 시적 풍경으로 펼쳐진다. 전통과 현대, 개인과 사회, 기억과 미래가 맞닿는 이 작품은 이이남 예술세계의 정수를 보여준다.
전시의 의의-새로운 시대의 감각을 향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원시인이다’라는 탐벨리니의 말은 이번 전시의 핵심 정신을 압축한다. 기술 문명의 급진적 발전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본질적 질문에 직면하며, 예술은 그 질문을 끊임없이 되묻는 장치가 된다.
빙하미술관의 개관전 ‘Beyond Black’은 탐벨리니의 전위적 실험과 카민, 이이남의 동시대적 해석이 교차하는 장을 마련한다. 관람객은 이 다층적 경험 속에서 빛과 시간, 기억이 교차하는 순간을 마주하며, 예술이 던지는 근원적 물음에 스스로 응답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