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집스러운 화가의 “얼굴” - 권순철“
우리 화단에서 권순철만큼 어쩌면 눈치(?)가 없고 고집스러운 화가도 없다.
그의 작품을 본 지금도 20년 전의 이런 턱없는 편견을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 도대체 화가로서 그는 예쁜 것을 그리지 않는다. 아니 그릴 줄 모르기 때문일까?
꾀죄죄한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척박하기 그지없는 산, 산, 산이 그의 예술에 전부처럼 보인다.
남들이 눈 덮인 설경을 아름답게 그릴 때도, 화사하게 꽃이 흐드러진 풍요롭고 넉넉한 산 풍경이 펼쳐져도. 작가는 그런 것을 예쁘게 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볼 줄 아는 눈을 일부러 가리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권순철은 팔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 없는 화가처럼 그림을 그린다.
그것은 마치 평생 남불의 멋있는 산 풍경을 그려도, 화폭에 되살아나는 그림들은 모두가 조각난 입체풍의 산 그림뿐이었던 한없이 미련해 보였던 그러나 나중에는 역사적인 세잔의 그림 걸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왜 그의 얼굴은 온통 거칠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투성이란 말인가.
참 궁금했다.
그래서 언제나 시작되기 전 성급하게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두면서도 그가 이번 전시에서 여느 작가들처럼 뜬금없이 꽃 그림이나 정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깜짝 쇼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다양한 언제나처럼 인간들의 무수한 표정을 불러 벽에 걸어둔다.
1960년대부터 시작한 쭈그러진 인간들의 초상은 우리들을 우울하게 했다. 그리고 60년이 지났건만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얼굴>들은 변함없이 우리들 가슴을 안타깝게 한다.
무엇이 이렇게 우리들 가슴을 흔드는가. 그것은 권순철이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얼굴에 대한 진지함과 열정,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 바로 사랑 때문이다.
나는 예술가가 만든 진실을 모두 믿지 않는다.
인생이 그렇게 슬프지만도 않고, 인생이 마냥 고통스럽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순철의 그림을 보면 우리 인생은 갑자기 힘들어지고 애틋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의외의 거역할 수 없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 “진리”를 만난다. 피카소가 화가에게 진리는 사기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 고통스러운 사람은 인간의 삶이 모두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행복한 사람은 언젠가 우리도 저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힘겹게 부대낄 수 있다고, 권순철 작가의 그림은 그 평범한 진실한 회화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거침없이 쏟아내는 한결같은 목소리에 크게 주목해야 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의 상처 난 얼굴, 이름 없는 소시민의 얼굴에서 만나는 슬픔과 힘겨움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진정한 참모습이며 그것이 참다운 예술임을 말이다.
그는 화해 분위기가 이루어져 그림이 밝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의 화폭에는 기쁨과 희망, 행복이 깃들 것 같지가 않다.
그런 점에서 늘 찡그리고 있는 얼굴을 평생 마주하고 있는 그는 지금은 불행한 화가처럼 보인다. 마치 고통스러운 절규를 토해내는 뭉크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를 보면 언제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깊은 애틋함을 간직하고 있다 .
정말 권순철만큼 고집불통인 화가가 또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박수근이 그랬던가 “잘 드는 칼로 새긴 것보다 무딘 칼로 새긴 것이 오래간다”라고. 그의 인물 속에는 그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의 침묵과 설움 등 힘에 부치는 우리 민중의 얼굴들이 고뇌하는 역사의 앵포르멜 시대처럼 뒤엉켜 얼굴들이 부활하고 있다.
그런 슬픔이 쩍쩍 묻어나는 얼굴들 속에서 권순철씨 만큼 고뇌했던,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화가 박수근의 항변을 듣게 된다.
“사람들은 자꾸 내게 묻는다, 왜 자꾸 그런 시장통에 사람들만을 그리느냐고?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그렇다. 그의 수많은 얼굴들이 늘어선 전시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또 착각한다. 그가 이중섭미술상 수상 작가가 아니라, 박수근 미술상의 첫 번째 작가였어도 참 좋았을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