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제상(諸像) Ⅴ

상에 대해서 그는 다음 네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첫 번째 상은 의식 속에 있다는 것보다 오히려 의식인 것이다. 두 번째 상은 상상하는 것은 지각과 사유의 중간적인 성격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지각과 같이 대상을 응시하는 면을 가지고 있지만 대상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받고 그것을 관찰하여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같이 대상에 대해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지탱하는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롭게 습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본질적으로 빈곤한 것이다. 세 번째로 상상적 의식은 대상을 무(無)로 가정한다. 다시 말해, 그 대상은 현실의 존재로서 지각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존재로서, 혹은 부재로서, 혹은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또 존재에 관해서 중화적인 태도를 가지고 가정한다. 네 번째로 상상적 의식은 스스로 대상을 무로서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이어서 창조적인 성격이다. 이 전체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상상력을 규정하고, ‘의식의 위대한 비현실화 기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신이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로부터 탈출하는 기본적 작용이 상상력에 있다는 것이다.〈Sartre, I'Imaginaire, p. 11;cf. pp. 15~24(Sartre 『상상력의 문제』11~31쪽〉

[박명인의 미학산책] 상상력의 제상(諸像) Ⅴ
[박명인의 미학산책] 상상력의 제상(諸像) Ⅴ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예술가의 창조적 상상력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사르트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친구의 얼굴이나 정육면체를 회상하는 것이다. 표상작용에 있어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창조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창조적이라고 평하게 된다. 곰브리치가 생각하고 있었던 일체화하는 활동에 있어서 요소는 기지(旣知)겠지만 그 일체화의 구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에서 새로운 구상을 보았을 때 처음으로 기지의 제대상이 실존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구상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신비하다. 적어도 창조적인 정신에 고유한 어떤 고차원적인 수동성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의미에서는 예로부터 영감설 쪽이 실태(實態)에 가깝다. 

또한 예술가의 예외적인 상상력이 아니고, 일상적인 상상력의 활동을 생각해 보아도 수동성의 계기는 중요하다. 상상력은 마땅한 자극을 받지만 작용하지 않는다. 상상력이란 오히려 자극을 받아서 활성화되어 시야를 넓혀 유연성이 늘어난 정신이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영감도 샘솟는다. 사르트르는 그 상상력론의 권말에서 예술작품 감상의 장면에서의 상상력 활동에 대해 논급한다. 그는 감상하는 작품을 이미지적인 것이라 간주하고 작품의 물질층을 이미지가 현상하기 위한 근본체로서 아날로공(anarogon)이라고 부른다. 이 물질적인 아날로공을 ‘무화(無化 nantiser)’해서 처음으로 이미지로서의 예술작품이 보인다. 그러므로 ‘실재적인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미는 상상적인 것으로 밖에 돌아 갈 수 없는 가치이며 세계를 그 본질적 구조에 있어서 무화하는 것을 수반하고 있다’고 하게 된다.〈Ibid., p. 362~73〉 이 경우의 이미지가 처음에 그가 분석하고 있었던 이미지의 특징과 부합될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별도로 하고, 자연미의 광경이나 예술작품의 내용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본질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다.〈이 점의 비판과 이 점을 바로잡는 것으로 후설의 상상력설에 관해 『예술작품의 현 상학』 제3장 ‘후설의 상상력론’(사르트르비판의 말은 79쪽 참조)〉

   자연이나 많은 예술작품은 내용적인 실재이며 미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실재성이 짊어지는 역할은 작지 않다. 사르트르의 설에는 정신과 구상 그리고 형을 편중(偏重)하는 서양사상의 정통적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정신을 활성화하는 대상으로서 형이 아닌 물질적 상상력에 주목한 것이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물질(질료)적 상상력’이다. 물질을 볼 때 우리는 그 형에 주목한다. 그러나 보는 것에 앞서, 물질과 직접적으로 촉발된 ‘물질적 몽상(夢想)’이 있어서 몽상적으로 보는 물질을 선택한다. 이 몽상은 마음속에서 무의식적인, 그리고 자연의 출산력(능력 생산적 자연)에 뿌리 내리고 있어서 이 관계를 바슐라르는 ‘접목’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보거나 형식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것은 눈이다. 그리고 물질적 상상력을 이끄는 것은 손이다. 

그것도 직접 물질을 만드는 손이 아니면 안 되고 완성된 것을 덧쓰는 손은 눈의 대용에 지나지 않는다. ‘자주 가능했던 윤곽선을 따라가고 이미 되어 있는 것을 검사하는, 신경을 맡기고 있는 애무하는 손은 용이한 기하학에 황홀할지도 모른다. 그 수단은 장인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철학자의 철학에 이끌어 간다. 미적인 영역에서 이미 되어 있는 작업의 시각화는, 저절로 형식적(형상적) 상상력의 우위를 만들어 낸다. 이것과는 반대로 근면하는 명령적인 손은 깊은 애정을 내보이면서 저항하는 육체와 같이, 저항하는 동시에 물질을 만드는 것에 의해 실재적으로 본질적 특징인 기능항진(dynamognie)을 배우는 것이다’. 손과 물질적 상상력은 물질을 그 ‘깊이나 실체적 내오성(內奧性)이나 부피(volume)’에 있어서 인식한다. 

이렇게 이해된 상상력은 현실의 상을 형성하는 활동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고, 현실을 노래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으로 규정된다.〈바슐라르 『물과 꿈』, ‘序 상상과 물질’ 전체의 요약, 인용된 문은 Bachelard I’eau et les rêver, p. 14, p. 19, p.3, p23〉 이러한 바슐라르의 사상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써 시문학에서만 변하며 현실의 경험과는 무연(無緣)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서양 사상의 정통이 정신과 신체의 상호 매개인 상상력의 신체활동을 정신화하는데 있어서 포착되는 사상의 신체적 위상을 포착한 대부분 유일한 사상이다. 그리고 형에 환원되지 않는 물질의 에너지, 그 촉발하는 힘을 포착하여 정곡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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