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예술계에는 이름만으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프랑스 출신의 데이비드 라페노(David Rappeneau)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동시대 작가 중 한 명이지만, 정작 그의 정체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나이, 학력, 개인적 배경조차 베일에 싸여 있으며, 갤러리 관계자들조차 그를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직 이메일로만 작품과 전시를 진행하는 작가. 그러나 바로 그 불가해한 거리감이 오히려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예술만 남기고, 자신은 사라진 작가
라페노는 SNS를 통해 종종 격정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예술을 그만두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들었다.”는 고백처럼 솔직하지만 곧 삭제되는 글은 그의 팬들에게 일종의 신화적 흔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것은 오직 작품뿐이다. 빼곡히 채워진 드로잉과 색채의 그리드, 그리고 대도시의 불안과 황홀 사이를 표류하는 듯한 인물들. 그의 그림 속 인물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잠겨 있으며, 우울하면서도 묘하게 매혹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컬트적 추종을 부른 드로잉의 세계
라페노의 작품은 아크릴, 볼펜, 연필, 목탄 등 다양한 재료로 완성되며, 늘씬한 인체와 기묘한 패션, 도시적 풍경이 뒤섞인다. 그의 인물들은 명품 브랜드 로고나 일상적 사물을 휘감고 있지만, 서로를 마주하지 않고 휴대폰, 거울, 창문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소통한다. 이는 현대 대도시가 품고 있는 소외와 고립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때로는 알약과 가루 같은 위태로운 소재가 등장하며, 장면은 기절 직전의 몽환적 시선처럼 흔들린다.
젊은 세대에게 라페노의 세계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라이프스타일’로 확장되었다. 전시장에서 그의 캐릭터처럼 옷을 입고 등장하거나, 라페노 티셔츠를 직접 제작하는 팬들이 나타나며, 그의 작품은 하나의 컬트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소규모 드로잉은 1만 달러대, 대형 작품은 3만 달러 이상에 거래되며, 수집가와 예술가들 모두에게 매혹적인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술사의 연속성과 현대적 감각
라페노의 작업은 단순히 동시대적 유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드로잉에는 유럽 미술사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섬세한 선, 에곤 쉴레의 왜곡된 인체, 모딜리아니의 눈동자 없는 얼굴, 그리고 90년대 비디오 게임의 미학이 한 화면에서 교차한다. 이런 역사적 언어를 차용하면서도 그는 이를 Z세대의 감각과 디지털 시대의 정서로 재구성한다.
비평가 찰리 폭스는 “라페노는 세상에 대한 초자연적인 비전을 보여준다. 트랜스젠더의 몸, 인간과 다른 존재의 몸을 묘사하는 방식은 현대적이며, 온라인에서 몸이 갖는 의미를 재구성한다”고 평가했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고통과 소외 속에서도 인물들에게 영웅적이고 마법적인 위상을 부여한다.
존재와 부재-사라짐의 미학
라페노는 전시장, 오프닝, 만찬 자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부재는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작품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드로잉 속 인물들이 가시성과 삭제 사이를 오가듯, 작가 자신도 현실과 신화 사이에서 모습을 지운다. 갤러리 디렉터 쿡 마로니는 “라페노는 시스템에서 한 발 물러섰기에 오히려 유기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의 존재는 오늘날 미술계에 드문 광경”이라고 말했다.
라페노는 실체보다 작품이 우선하는 드문 사례다. 과도한 노출과 홍보가 지배하는 예술계에서, 그는 오히려 부재와 침묵을 통해 예술의 본질, 즉 작품에 대한 집중을 환기시킨다. 바로 그 점에서 데이비드 라페노는 동시대 미술계가 가장 주목해야 할 신비로운 이름으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