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더비 런던 '거장들이 모인 마지막 인명사전'
2025년 9월, 소더비 본드 스트리트 경매 개막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예술 후원자’라는 말이 점차 희미해지는 이 시대에, 폴린 카르피다스의 이름은 여전히 예술 현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선명하게 빛난다. 영국 현대미술의 성장과 초현실주의 컬렉션의 결정체를 만들어 온 그녀의 전설적인 소장품들이 오는 2025년 9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다. 이번 경매는 단일 컬렉션으로 6천만 파운드(한화 약 1,000억 원) 이상의 낙찰가가 예상되며, 소더비 유럽 경매 역사상 최고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르네 마그리트, 라 동상 (1940~41). 예상 9~1200만 파운드. 소더비 제공.
르네 마그리트, 라 동상 (1940~41). 예상 9~1200만 파운드. 소더비 제공.

초현실주의의 심장, 그 한가운데서 수집된 250점
카르피다스의 수집 철학은 ‘많이 모으는 것’이 아닌, ‘정확히 모으는 것’에 있었다. 그녀의 런던 자택에서 출발하는 이번 경매는 르네 마그리트, 레오노라 캐링턴,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레 랄란(François-Xavier & Claude Lalanne) 등 초현실주의 대가들의 정수라 할 작품 250여 점으로 구성된다.

소더비 유럽 회장 올리버 바커(Oliver Barker)는 “이 컬렉션은 말 그대로 초현실주의의 인명사전과 같다. 작품의 출처 하나하나가 놀라울 정도”라며,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윌리엄 코플리 등 초현실주의 핵심 인물들의 유산에서 직접 구매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고 설명했다.

폴린 카르피다스. 카르피다스 가족 기록 보관소 제공.
폴린 카르피다스. 카르피다스 가족 기록 보관소 제공.

경매의 정점: 마그리트의 'La Statue volante'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르네 마그리트의 'La Statue volante'(1940–41). 밀로의 비너스를 다시 변형한 이 수수께끼 같은 회화는 1985년 카르피다스가 직접 구입한 작품으로, 추정 낙찰가는 900만~1,200만 파운드(한화 약 180억 원)에 이른다.

그 외에도 마그리트의 'La Race blanche'(1937, 약 132만200만 달러), 'Tête'(1960, 약 40만66만 달러), 'Les Menottes de Cuivre'(1936, 밀로 비너스를 모티프로 한 드로잉, 약 40만~66만 달러) 등 10여 점이 경매에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카르피다스가 마그리트의 미망인 유산 경매(1987년 소더비)에서 직접 구매한 것이다.

폴린 카르피다스의 런던 자택 살롱 전경. 소더비 제공.
폴린 카르피다스의 런던 자택 살롱 전경. 소더비 제공.

레 랄란과의 개인적 우정, 그리고 작품
카르피다스는 클로드 랄란 및 프랑수아 자비에 랄란과 생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두 작가의 주요 작품을 선구적으로 수집해 왔다.

경매에는 버터플라이 샹들리에(2012), 악어 의자(1999), 그리고 그녀의 주방 중심이었던 오 카나르 테이블(추정가 약 105만 달러)이 출품된다.

클로드의 대표작인 ‘악어 의자’는 한밤중, 실제 죽은 악어를 얻기 위해 지역 동물원을 방문했던 일화가 배경이 된 기이한 작품이다. 니키 드 생팔의 중재로 이뤄진 거래는 예술과 현실이 교차하는 극적인 순간이었으며, 이는 작품의 독창성을 대변한다.

르네 마그리트, 테테 (1960). 예상 £300,000-500,000. 소더비 제공
르네 마그리트, 테테 (1960). 예상 £300,000-500,000. 소더비 제공

워홀과의 우정, 그리고 ‘예술에서 온 예술’
앤디 워홀은 1978년 폴린 카르피다스를 만나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했고, 둘은 예술과 보석 디자인에 대한 공통 관심을 바탕으로 오랜 친구로 지냈다. 이번 경매에는 워홀의 대표작 4점이 출품되며, 특히 뭉크 이후 시리즈인 '마돈나와 해골 팔을 든 자화상', '절규'는 각각 150만~300만 파운드(약 200만~397만 달러)의 낙찰이 예상된다.

레오노라 캐링턴, 《천사의 시간》, 추정가 60만~80만 파운드. 소더비 경매 제공.
레오노라 캐링턴, 《천사의 시간》, 추정가 60만~80만 파운드. 소더비 경매 제공.

‘지식의 무게를 짊어진 아틀라스’
전시 전시회는 9월 8일부터 소더비 본드 스트리트 갤러리에서 시작되며, 9월 17일(이브닝 세일)과 18일(데이 세일) 양일 간 본 경매가 진행된다.

경매의 키워드는 ‘전환기’, 그리고 ‘전수’다. 카르피다스는 이번 경매에 대해 "이제 이 컬렉션이 다음 세대를 위한 손에 전해질 시기"라며, 자신의 역할을 “예술의 임시 관리자”라고 명확히 밝혔다.

클로드 랄란, 악어 의자 (1999). 추정가 18만~25만 파운드. 소더비 경매 제공.
클로드 랄란, 악어 의자 (1999). 추정가 18만~25만 파운드. 소더비 경매 제공.
살롱의 또 다른 모습. 벽에는 예술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소더비 경매 제공
살롱의 또 다른 모습. 벽에는 예술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소더비 경매 제공

문화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컬렉션
카르피다스는 단지 수집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런던 테이트 미술관의 후원자이자 뉴욕 뉴뮤지엄의 교육 센터 설립을 지원했으며,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등 YBA 세대 작가들을 아끼고 지원해 온 현대예술의 실질적 스폰서였다.

이번 경매는 단지 ‘작품의 판매’가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적 미의식과 후원정신이 어디까지 예술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녀의 수집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예술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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