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푸른 하늘의 청(靑), 누런 땅의 황(黃), 붉은 열매의 적(赤), 뿌리처럼 깊은 흑갈색(黑), 그리고 유백색의 바탕(白). 전통 오방색의 상징 체계를 품은 다섯 가지 주요 색채가 화면 속에서 차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단순한 색의 배치가 아니라, 동양 회화 전통 속에서 인간과 자연, 우주를 연결하는 의미망을 불러오는 장치다. 화면의 중심부에는 고건축 지붕의 이음 구조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형태가 자리하며, 그 위로는 단청과 수막새 문양이 희미하게 겹쳐진다. 시선은 과거의 건축물과 문화유산 속으로 스며들듯, 이세득이 구축한 회화적 시간 속을 천천히 거닐게 된다.
'전설기 77-B'(1977)는 표면 질감에서부터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다. 때로 거칠고 건조하게, 때로 부드럽고 짧게 반복되는 붓질이 화면을 채우며, 마치 세월의 침식이 새겨진 고벽화 같은 감각을 자아낸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엉켜 붙었다 해체되는 형태들은 색채와 맞물리며 리듬을 형성한다. 이 생동감은 격정적인 앵포르멜의 폭발력이나 절제된 단색화의 고요함과도 다른, ‘서정 추상’이라는 독자적 세계를 만든다.
평론가 이경성은 “그의 모든 작품이 도달한 세계는 율동적이며 음악적인 정서성이다. 투명하고 구조적인 시각 리듬을 통해,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한 미의식을 끌어낸다”고 평했다. 1970~80년대는 이세득 예술의 절정기였으며, '전설기 77-B'는 그 시기의 조형 언어와 정신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경계를 허문 예술가, 이세득
1921년에 태어난 이세득은 회화뿐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타피스트리 등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한국 최초의 무대막을 제작한 장본인이며, 다양한 매체 실험을 통해 감성과 지성, 경험과 사유가 녹아든 독창적 세계를 펼쳤다. 그의 작업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과잉되거나 부족하지 않은 균형 속에서 완성됐다. 특히 ‘빛’과 ‘색채’에 대한 깊은 탐구는 회화뿐 아니라 건축적·공간적 맥락 속에서도 구현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립했다.
박혜성 학예연구사의 시선
국립현대미술관 박혜성 학예연구사(미술경영 박사)는 이세득의 회화를 “엉겨 붙듯 해체되는 형태와 생동감 넘치는 색채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해석한다. 그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흘러 넘치지도 않는 미학이 새로운 서정 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하며, '전설기 77-B'를 단순한 조형 실험 이상의 ‘사유의 공간’으로 본다.
박 연구사는 이세득이 평생을 두고 시도한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타피스트리 작업이 한국 미술의 확장에 기여했다고 강조한다. 특히 빛과 색채를 매개로 공간 전체를 재구성하는 그의 능력은, 여전히 많은 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기억과 색채의 울림
'전설기 77-B'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건물, 문양, 색채가 남긴 기억과 흔적을 담고 있다. 화면 위에서 오방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이 작품은 그 기억들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단면’이자,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고요한 대화의 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자리한 이 작품은, 여름의 수만 가지 빛깔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은 색과 형태, 그리고 사유의 파편들이 만나 울림을 만드는 순간이며, 한국 서정 추상의 정수와 그 미학적 가능성을 재확인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