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도금 시대' 의상 디자이너 카시아 왈리츠카-마이모네의 예술사적 영감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1880년대 뉴욕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HBO의 시대극 '도금 시대(The Gilded Age)'는 세 시즌 동안 치밀한 시대 재현과 화려한 의상으로 전 세계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연 배우 캐리 쿤, 크리스틴 바란스키, 모건 스펙터가 그려내는 신·구 사회 계층의 갈등 속에서, 매 장면마다 화면을 수놓은 건 다름 아닌 수백 벌의 화려한 드레스였다. 이 의상들의 주인공은 영화 '문라이즈 킹덤', '카포티' 등으로도 이름을 알린 의상 디자이너 카시아 왈리츠카-마이모네다.

1 왼쪽-캐리 쿤이 연기한 버사 러셀. 오른쪽-존 싱어 사전트, 휴 해머슬리 부인 (1892)
1 왼쪽-캐리 쿤이 연기한 버사 러셀. 오른쪽-존 싱어 사전트, 휴 해머슬리 부인 (1892)
버사 러셀 역의 캐리 쿤이 청록색 공작새 모티브 드레스를 입고 등장. HBO Max 제공.
버사 러셀 역의 캐리 쿤이 청록색 공작새 모티브 드레스를 입고 등장. HBO Max 제공.

역사와 상상력의 경계에서
왈리츠카-마이모네는 19세기 말 뉴욕 사회를 그리되, 단순 재현이 아닌 ‘편집된 역사’를 목표로 했다. 그는 존 싱어 사전트, 조반니 볼디니, 제임스 티소 등 당대 화가들의 초상화를 무드보드 삼아 4만 장이 넘는 시각 자료를 수집했다. “화가들이 이미 미감을 걸러낸 방식에서 배웠다”는 그의 말처럼, 드레스는 화폭 속 인물의 기품과 색채를 스크린으로 옮겨왔다.

시즌 1 피날레에서 루이자 제이콥슨이 착용한 연노랑 드레스와 검은 초커는 사전트의 1885년작 ‘폴 푸아르송 부인’ 초상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캐리 쿤의 버건디 가운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휴 해머슬리 부인’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왼쪽-영화 '도금 시대' 의 한 장면 . 오른쪽-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 (1865)
왼쪽-영화 '도금 시대' 의 한 장면 . 오른쪽-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 (1865)
왼쪽- 루이자 제이콥슨이 연기한 마리안 브룩. 오른쪽- 존 싱어 사전트의 폴 푸아르송 부인의 초상화 (1885).
왼쪽- 루이자 제이콥슨이 연기한 마리안 브룩. 오른쪽- 존 싱어 사전트의 폴 푸아르송 부인의 초상화 (1885).

박물관을 무대로 한 색채의 혁신
그의 작업실에는 전 세계 박물관 디지털 컬렉션에서 가져온 드레스 이미지가 즐비하다. 팬데믹 시기 온라인 공개가 확산되며 메트로폴리탄, V&A, 필라델피아 미술관 등지의 의상 자료가 손끝에 닿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1880년대에 이미 유행했던 대담한 색채와 비대칭 디자인을 복원해냈다. 당시의 폭발적인 색상 조합은 인공 염료 발명과 맞물리며 이전 시대와 다른 ‘색의 혁명’을 만들었다.

왼쪽-글래디스 러셀(타이사 파미가). 오른쪽-Giovanni Boldini, Signorina Concha de Ossa (1888)
왼쪽-글래디스 러셀(타이사 파미가). 오른쪽-Giovanni Boldini, Signorina Concha de Ossa (1888)
왼쪽-타이사 파미가가 연기한 글래디스 러셀. 오른쪽-제임스 티소, '해변(7월- 초상화의 표본)' (1878
왼쪽-타이사 파미가가 연기한 글래디스 러셀. 오른쪽-제임스 티소, '해변(7월- 초상화의 표본)' (1878

버슬과 색, 사회 계급의 코드
1880년대 제2버슬 시대의 실루엣을 고수하면서도, 등장인물의 사회적 위치를 의상에 반영했다. 보석 톤과 금색, 고전적 패턴을 입은 아그네스는 구세대 사교계를, 은빛과 밝은 팔레트를 입은 버사는 신흥 부호층을 상징한다. 이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통 전시실과 휘트니 미술관의 현대적 공간을 대비하는 은유처럼, 사회 변화의 시각적 언어가 되었다.

왼쪽-데니 벤튼이 연기한 페기 스콧. 오른쪽-미국식 애프터눈 드레스(188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왼쪽-데니 벤튼이 연기한 페기 스콧. 오른쪽-미국식 애프터눈 드레스(188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왼쪽-캐리 쿤이 연기한 버사 러셀. 오른쪽-하우스 오브 워스(1898–1900)가 디자인한 이브닝 드레스.
왼쪽-캐리 쿤이 연기한 버사 러셀. 오른쪽-하우스 오브 워스(1898–1900)가 디자인한 이브닝 드레스.

예술 수집가의 옷장
왈리츠카-마이모네가 특히 애정을 쏟은 캐릭터는 실비아 체임벌린 부인이다. 실존 수집가 아라벨라 헌팅턴을 모델로 한 그녀의 옷장에는 드가, 코로, 카유보트의 회화가 걸려 있었고, 의상은 그녀의 미술 취향과 개성을 대변했다. “체임벌린 부인은 새로운 시각 언어를 발견한 인물”이라며, 디자이너는 그녀를 실험적 역사 의상의 상징으로 구현했다.

인상주의처럼, 의상도 ‘인상’을 남긴다
그에게 도금 시대 의상 디자인은 인상주의 회화와 닮았다.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들이 현실을 재해석했듯, 그는 역사적 고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해 1880년대를 ‘지금의 시선’으로 재조명한다.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순간,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다가간다”는 그의 말은, 시대극 의상이 단순한 복식 재현이 아니라 문화·미술사적 대화임을 보여준다.

왼쪽-잔 트리플혼이 연기한 실비아 챔블러레인. 오른쪽-아라벨라 헌팅턴. 헌팅턴 도서관 제공.
왼쪽-잔 트리플혼이 연기한 실비아 챔블러레인. 오른쪽-아라벨라 헌팅턴. 헌팅턴 도서관 제공.
HBO Max 제공
HBO Max 제공

'도금 시대'의 의상은 박물관과 화가의 캔버스, 그리고 21세기 스크린을 잇는 통로다. 그 속에서 왈리츠카-마이모네는 황금기의 호사스러운 아름다움과 미술사의 숨결을 함께 복원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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