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정 작가 '거인의 시선으로 인간다움의 뿌리를 묻다'
2025. 8. 1(금) ~ 9. 6(토) | 갤러리 루안앤코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서울의 한 여름, 갤러리 루안앤코에서는 서민정 작가의 개인전 'The Human Condition: 인간의 조건'이 한창이다. 2023년 첫 개인전 'Like A Joke' 이후 2년 만에 같은 공간에서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21점의 신작 회화를 통해 ‘거인의 시선’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조건과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탐구한다.
거인, 인간의 조건을 비추는 거울-서민정의 회화 속 ‘거인’은 특정 인물도, 신화 속 한 영웅도 아니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소환하는 이 존재는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은 채, 인간 내면의 유한함·연민·갈등·가능성을 품고 화면을 거닌다. 관람자 앞에 선 거인은 크기의 압도감보다 시선의 무게로 다가온다. 그 시선은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동시에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을 비춘다.
이 ‘거인’은 마치 자기 자신을 잊은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서민정은 거인을 통해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감정과 사유가 교차하는 회화적 대면을 이끌어낸다.
혼돈의 기원 ‘카오스’에서 출발한 회화적 사유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축은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속 ‘카오스(Chaos)’ 개념이다. 서민정은 형태 이전의 무정형 상태,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덩어리를 화면에 구현하며, 존재의 기원과 잠재성을 탐구한다.
'Untitled Chaos Series'에서는 뭉개진 색 덩어리들이 서로 충돌하고 녹아드는 과정을 통해, 질서 이전의 에너지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덩어리와 색면의 경계는 모호하고, 그 속에서 거인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나거나 사라진다. 이는 인간 존재가 혼돈 속에서 태어나고, 그 불확정성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은유한다.
작품별 해설—감정, 여백, 그리고 도시
전시는 '감정의 정원'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감정을 토양에 비유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관계와 사건이 그 위에 뿌리를 내린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수면 아래의 정원'에서는 고요한 표면 아래 잠들어 있던 감정의 소리가 은은하게 번진다. 관람자는 무의식 속 억눌린 감정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게 된다.
전시 중반부의 'Place of Stillness'와 '물의 왕관, 카라의 속삭임'은 혼돈 이후 찾아오는 평화와 고요를 형상화한다. 화면 속 물결과 빛의 흔적은 동양 철학의 ‘정중동’을 시각화하며,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정적을 전한다.
마지막 섹션에서는 내면에서 출발한 사유가 사회로 확장된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도라지꽃이 담긴 바구니를 통해 조건 없는 나눔을 상징하고, 'Under the Sun.city'에서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풍경이 펼쳐진다. 사랑과 평화의 실천이 모여 형성된 유토피아적 공간은, 작가가 꿈꾸는 ‘태양 아래의 도시’다.
큐레이터의 시선—“신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언어”
루안앤코 측은 이번 전시를 “신화와 현대적 실존이 만나는 회화적 실험”이라고 평했다. 서민정은 신화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이를 통해 인간다움의 근원을 탐구한다. 거인의 시선과 혼돈의 형상은 관람자에게 미학적 경험을 넘어 내면적 대화를 제안한다.
큐레이터는 “그의 회화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위한 감각적 기록이며, 관람자에게는 각자의 ‘인간 조건’을 묻는 거울과도 같다”고 덧붙였다.
인간다움의 회복을 향한 제안-'The Human Condition'은 단순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전시가 아니다. 서민정은 혼돈 속에서 의미를 찾고, 연민과 여백을 간직하며, 무너져도 다시 살아가는 힘을 그려낸다. 관람자는 작품 앞에서 마치 오래된 친구와 대화를 나누듯, 자신의 상처와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9월 6일까지 서울 갤러리 루안앤코에서 이어지며, 관람객에게 거인의 시선을 빌려 스스로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선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