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권기자에게 선물한 최고의 훈장, 물감덩어리'
김종근 (미술평론가)
파격적으로 시간과 시대를 앞서간 창시자 백남준은 첨단의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물었다. 그는 인간 삶의 근원인 시간에 대한 성찰을 ‘시간도 끝나가고 테이프도 끝나간다’로 종결지으면서 그 고민을 예술로 풀어냈다.
시간에 대한 성찰을 치열하게 다루고 있는 권기자도 이러한 카테고리 그룹에 대표적인 작가이다.
<Natural>이란 주제 안에서 펼쳐지는 수행 같은 반복적인 붓질, 그 물감들의 흔적과 집적, 그리고 그들이 시각적 오브제로 만들어진 색 덩어리의 세계는 단연 매력적이고 호화찬란하다.
스타 화가들의 탄생과 비결을 연재하면서 얻은 귀중한 결론 중 하나가 권 기자에게도 있다.
예를 들면 화분 작업으로 유명한 장 피에로 레이노가 원예학과 출신이라는 사실, 조각가 세자르가 학창시절 폐차장에서 차를 압축하고 찍어 누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경험, 론 뮤엑이 소품 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방송 소품제작을 만들었다는 체험들이 바로 스타 화가들의 공통적인 작업에 출발이란 점이다.
권기자도 그러했다. 그녀가 젊었을 때 경험한 염색 사업의 풍부한 체험과 경험이 지금의 이런 작업을 가능케 했던 원초적인 배경이었다는 점이 놀랍도록 흥미를 끈다.
특히 색채의 조합이나 색상들의 배열과 층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어울림이 마치 염색의 물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발견된다.
이러한 형태의 탄생과 비법이 모두 권기자의 체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숙명적인 작가의 운명처럼 인지된다.
권기자의 이런 작업 유형은 이미 두 가지 패턴과 형식으로 초기부터 그만의 독창성을 가지면서 주목받았다.
하나는 평면에 대한 그리기 작업이었다. 마치 올 오버 페인팅 (All over painting)이란 “전면회화”를 강력하게 연상시키며 완성된 평면 회화는 그 색채와 조형미의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작업하면서 떨어지는 그 물감의 찌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결합한 행위의 결과가 놀라운 예술작품으로 탄생 되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집중적으로 형태와 색채를 교체하면서 시간의 쌓아 올리기를 탁월한 조형적 형태로 전환 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간이 연속성을 획득하고 가질 때마다 그것들이 독특한 형태미를 가지며 이렇게 시각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가능하다는 작가정신과 철학을 지켰다는 점이다.
이미 작가는 단순한 그 예술적 행위에 안주하지 않고 마치 무지개처럼 풍부한 멋진 색상으로 엮어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권기자의 미적 조형성과 풍요로운 색상의 오케스트라 같은 화음을 발견한다. 당연히 이 모든 형태와 질료의 만남이 세련되고, 그 어느 작가의 평면 회화와 입체작품보다도 멋진 리듬감과 형상으로 독창성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Time Accumulation》은 비록 정적으로 보이지만 강렬하게 권기자 작가의 `층층이 쌓인 물감, 곧 인생의 단면`은 멋지고 황홀하다.
이러한 작품 탄생의 배경에는 작가는 “작가라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걸 추구하고, 치열하게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작가정신과 보편적인 기하학적 추상에 탐닉하거나 빠지지 않고 작가의 창조적인 직관에 따른 창작 행위를 권기자 미술작품의 특징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메시지의 스펙트럼도 다분히 서정적 추상 화풍을 떠올리는 효과, 구름 덩어리 같은 조각 이미지들을 화폭 속에 담아내는 작가의 조형에 대한 감각이 거침없이 세련되게 축적된 것이다.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 마침내 평면이 형성되고, 결국에는 하나의 훌륭한 입체와 오브제 작품으로 위대하게 조립, 탄생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물감의 재료들, 그것을 아래로 떨어진 것들을 모아 칼로 자르는 절개의 기법이 어떻게 이렇게 신비스러운 형태로 변모하고 가능했을까를 반문하게 된다.
권기자는 이렇게 화면에서 떨어져 쌓인 그 물감들을 횡으로 과감하게 절단하는 테크닉을 구사한다. 이러한 형식을 통하여 작가는 다른 어떤 예술가가 보여주지 못한 표출형식에 충분히 도달하여 신선한 시각적 즐거움을 부여한다.
이미 이것만으로 권기자의 표현 세계는 평면과 오브제의 경계는 물론 입체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단언컨대 권기자 작가는 다채로운 조형적인 형태와 색 덩어리로 축적된 시간의 흐름을 회화로 창조해 냈다.
그 흔해빠진 집적된 물감의 찌꺼기들로 마치 정크 아트 같은 재질감과 효과들이 모여 최고의 시각적 추상 형태가 창조된다. 그것도 모든 흐름을 자연의 질서에 맡겨 둔 그것처럼 말이다.
결국, 작가는 작품을 위한 사유의 시간 동안 흐르고 쌓인 시간의 축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마치 피카소가 작품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권기자가 지금까지 흘러내리기의 형식을 자연(nature) 시리즈에 결합하고 아우르는 의지는 과거부터 흘러온 시간들의 축적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환상적이게도 이 물감들의 집적과 축적에 켜들이 탁월한 시각적 즐거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권기자만이 보여주는 흘러내림을 바라보는 시간에 대한 고민과 사유의 흔적 바로 그 표식이다
그래서 권기자의 작품은 권기자가 만든 것이 아닌 권기자의 시간이 연출해낸 공동의 수작들이다. 결코, 인위적이지 않은 기다림이 가져다준 신비스러운 색채의 조형물이자 시각적 오브제의 결정판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이탈리아 태생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그의 저서에서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전형적인 통념을 전복하며 시간의 상대성, 비선형성, 개별성에 주목했다. 시간에 대한 결정판 , 권기자의 미술작품이 그러했다.
베니스비엔날레 60주년 특별전은 그래서 시간이 권기자에게 선물한 최고로 아름다운 훈장 같은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