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뎃상하는 가장 행복한 색채화가 – 이대원
김종근 미술평론가 

“ 그래 , 박수근에 대해 궁금하다고 했지. 1957년 6월 내 첫 번째 개인전에 도상봉 선생과 함께 한 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지. 참 첫 인상이 매우 겸손하고 과묵한 느낌이었고, 소박한 화가였지. 시장에 앉아있는 아낙네를 주로 그리면서 , 사람들이 왜 당신은 자꾸만 그런 시장바닥의 사람들만 그리느냐고 물으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것인데 그럼 나한데 무엇을 그리느냐고.. 그랬지. ” 

이중섭도 1955년 말 성북동 수화(김환기)댁에서 대학선배인 유석진 박사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지 그의 색채에 대한 고백을 기억하고 있지. 근데 사실 박수근은 내가 키웠지, 자 이제 차나 한잔해“ 이대원 선생님 웃으면서 그는 그렇게 따뜻하고 자상했다.  

1981년 내가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수근에 관한 평문을 쓰려고 그를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은 홍익대학교 총장이셨다. 훨씬 이전에 그는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의 책임자 이기도 했었다.  

반도호텔에 여섯평 남짓한 공간에서 운영됐던 화랑. 그때 이 화랑에는 작가들이 「미스 박」이라 부르며 귀여워한 여자가 있었다. 소정 변관식은 결혼한 그녀를 심지어 「박양」이라 불렀다. 그녀가 바로 한국화랑가의 대모 현대화랑의 박명자 여사였다. 모든 예술가들은 이대원 선생과의 이런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럴정도로 그분은 미술계를 아우르고 있는 8순의 신사이다.

이대원, 농원, 1987, 캔버스에 유채, 110x160cm (사진=서울미술관)-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이대원, 농원, 1987, 캔버스에 유채, 110x160cm (사진=서울미술관)-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이대원,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 또한 화려하고 다채롭다. 경성제대의 법학도 출신 화가, 최초 상업화랑의 경영자, 총장을 역임한 총장 화가화단의 멋쟁이화단의 귀족‘ 화단의 신사’ 모두가 그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수려한 용모와 사려 깊은 매너, 자상함, 그러면서도 낙천적인 성격과 선비적 체질, 그가 아끼는 제자들의 전시장을 손수 찾아가 보아주고, 작품을 사 주는 끔찍한 제자 사랑도 이대원 화백의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 모든 형용사 가운데 그를 가리키는 정확한 표현은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이다. 50년 지기인 친구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의 농담이 섞인 별명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고통보다는 행복하고, 소박함보다는 화사하고 아름답고 경쾌하다. 

어떤 작품이든 파랑 노랑 빨강 초록 원색들이 서로 부딪쳐 빚어내는 환상적인 색채들의 조합은 눈부실 정도로 찬연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사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한 시대를 살아온 가장 근대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화가인지도 모른다. 
화필을 잡은 지 올해로 70여 년. 서울 청운초등 5학년 때 「백일홍」을 그려 눈길을 끈 그는 경복고교에서 이종우 씨와 일본인 사토 구니 오 씨를 스승으로 만난다. 

이대원, 농원, 1997, 캔버스에 유채(사진=서울미술관)-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이대원, 농원, 1997, 캔버스에 유채(사진=서울미술관)-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유영국, 장욱진, 권옥연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다 이 학교 선후배들이라는 사실이 그의 화단에 예술적 교류의 일면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간절히 소원했던 재주를 뒤로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진학한다. 법과에 다녀 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부친과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효도 진학을 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열일곱 살 경복고 시절 “언덕 위의 파밭”과 “뜰”로 1938년-39년 조선미술전(鮮展)에 연이어 입선하며 그 재능을 인정받는다. 

이러한 아들의 열정에 감복한 선친은 이후 그가 그림에 몰두하도록 당시에 꽤나 비싸고 귀한 유화 도구 일체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자기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내 식으로 그린다는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을 배웠고, 한편 그는 심산 노수현 화백에게 사군자와 글씨를 배우기도 했다.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전통적인 기본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후에 그의 작품에 펼쳐질 점과 선의 오묘한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부지런한 배움의 열정은 청전 이상범이 “서양 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독창적인 그만의 양식을 이룩하는데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세계적인 프랑스의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의 지적처럼 ” 동시대 화가들 중에서 가장 서양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며, 그의 작품에는 그가 서양미술에서 발견한 기법과 영감이 담겨있다.”라고 할 정도로 쇠라나 시냐크 류의 점묘법 화풍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대원, 농원, 캔버스에 유채, 112.1×162.2cm (100호), 1993-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이대원, 농원, 캔버스에 유채, 112.1×162.2cm (100호), 1993-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그러나 한편 자세히 보면 “조선시대의 수묵 법과 중국의 묘 화법을 모델로 붓놀림을 연습하면서 생각해 낸 것은 칸딘스키의 점. 선 면 개념이 한국화와 기본을 같이하고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이 기법은 동양과 서양이 절묘하게 만나는 자유롭고 힘찬 선들의 축제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서양의 점묘법과 동양 수묵화의 필법이 만나는 화합의 지평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이다. 

정말 우리는 어느 작가의 어느 화면에서 색종이로 오려낸 수 없는 조각의 필선들이 출렁이는 환상적인 화면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대원이 아니면 불가능한지도 모르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그가 이렇게 치열하게 빚어내는 기본적인 바탕과 뿌리에는 나무이며 연못이며 그의 과수원이다. 

작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읽는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는 혼신의 열정으로 그의 삶을 과수원의 나무에서 찾는다. 한결같이 너무도 한결같고 집요하여 마치 사과에 집착 했던 폴 세잔느 같기도 하다.  
 그의 초기에 그림에서 우리는 점묘파 화가들이 보여주는 특성들을 발견한다. 모자이크식 색점, 강렬하게 삐쳐나가는 황․적․청․녹 및 연두색 등 원색의 화사한 색채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산, 나무, 꽃, 풀 등 생동하는 사계절의 봄날이거나 가을의 과수원으로 변한다. 

주제에서는 집요하되 그는 마치 무골의 호인처럼 대단히 부드러운 화가이다. 그러나 자연과 풍경 그리고 예술에 관한 한 한없이 고집스러운 화가이다. 동료들 대부분이 5-60년대 구상화풍을 버리고 모노크롬이나 미니멀리즘 경향의 추상회화에 길을 찾아갔을 때 , 그는 산과 들, 자연풍경등이 어우러진 농원시리즈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 또한 이대원의 선택이며 그의 선택은 평생의 선택을 의미한다.  

소박한 기법과 장식적인 색채 등 그의 변화는 1960년대로 접어든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그는 여전히 감각적인 색채의 풍경화로 원색으로 눈부실 정도의 강렬한 점들의 겹침으로 화면을 태피스트리처럼 엮어내었다. 
마치 이 기법은 선과 점에 의한 서양화이면서 수묵화의 전통을 느끼게 해주는 먹선들로 높은 완성도를 이루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작품의 배경은 파주의 농원이다. 파주는 아버지가 그의 입학을 기념하기 사준 땅이며 그가 자연에 대해 새롭게 눈뜨며,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한 마음의 고향이자 그 모든 작품들의 친정이자 원천이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살고 있다. 그는 거기서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 나뭇가지는 생명의 선이다라며 “자연은 계절 따라 시간 따라 보는 이의 마음 따라 그 모습이 무한하게 변한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그는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빛을 데생한다” 고 했다.

그 나무들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져 마치 색을 털어내면 수묵화의 위대한 전통을 보는 착각을 불 러 일으키기도 하며 점과 선을 털어내면 마티스의 야수파 색채를 생각나게 한다.   
중기의 작품에서 후기의 작품으로 이행할수록 그의 색채와 형태의 세련미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듯하다. 자유자재로 원근법과 평면을 넘나들면서 그는 색채의 마술사처럼 화면을 엮어낸다.  

이대원 작가와1987경-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이대원 작가와1987경-사진제공 김종근 미술평론가

 “ 우리는 그의 풍경화의 정경 저편에 있는 기분이다. 그의 그림은 독특한 주제인 우주의 심오한 본질 속에는 삶의 즐거움이 듬뿍 아름답게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교훈에는 국경이 없으며 그것은 범우주적인 정서의 진솔한 공증이다.”라고 쓴 피에르 레스타니의 음성들이 그의 그림에 어른거린다. 

이대원의 작품은 이렇게 70여년의 화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농원'이라는 주제를 필생의 화두처럼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의 조형 세계를 굳건하게 지켜옴으로써 그것은 이대원 특유의 점묘법이 되어 이대원표 국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원근법에서 자유롭게 벗어난 게 간결하며 황홀한 화면. 불규칙한 듯 자유롭게 그어진 거침없는 색점. 바로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찾으려 했던 색들의 천국이 그의 작품에 모여 있는 듯하다.  

같은 예술원 회원인 권옥연 화백은 그의 이런 ‘농원’ 주제만 그리는 그를 향해 아버지에게 덕보고 있는 화가라고 농담으로 놀리고 있다. 이제 그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 섭섭해한다.    
그런 과수원에 대해 일본의 다마미대(多摩美大) 다데하라 아기라 교수는 “과수원에 내리쬐는 빛은 나무들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독특하고 고귀한 감수성을 지닌 화가를 성장시켜온 것이라고 그의 예술세계의 원천이 여기에 있음을 정의했다. 
아니다 주제는 과수원이라 할지라도 그의 이런 감성은 오히려 오래전부터 골동품을 수집한 탁월한 그의 안목과 취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과 만나 이야기하고 점심을 함께하는 동안 선생님은 내가 그리워하고 기억했던 그 시절의 아버님 같은 따뜻함 대신 자신의 예술을 향한 열정이 넘쳐나고 있었다.  
세월은 작품도 바꾸지만 사람도 변하게 한다. 그것이 나를 참 우울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는 후학으로서 박수근 그림을 본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랑과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그의 독백이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이제 이대원 선생님의 예술세계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랑받고 읽히길 나는 소망한다.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후배 화가와 사람들은 많다. 그는 많은 사랑을 후배들에게 베풀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하루 5~6시간 이상의 작업으로 한해에 대작과 소품들을 70점가량을 제작한다. 그는 그것으로 내년 갤러리 현대에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 옛날에는 나와 같이 일을 했는데 이제는 내가 전시를 열어달라고 부탁해야 돼” 하시며 그는 눈 덮인 파주행을 접고 홍대 앞 화실로 들어섰다. 

 "주중에는 서울 작업실에서, 주말에는 경기도 파주 농장을 찾아가 붓이 마른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작업하고 있다. “ "1957년 동화화랑(신세계백화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 때처럼 매번 전시는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수줍어했다. 
그러면서 그는 영어와 일본어는 물론 독일어와 중국어에 능통에도 모자라 프랑스 여행할 때 불어를 모르면 불편하다고 사전을 펴놓고 불어를 배우고 있다. 

그의 예술세계와 배움에는 농원의 그림처럼 끝이 없다. 그것이 이대원 화백의 초상이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한 노화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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