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태도론 Ⅵ

문제는 같은 논의가 왜 2세기를 경과하면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딕키는 미적태도의 개념이 미학을 일변도로부터 해방하여 낡은 예술관의 편견을 억제하고, 추상미술에 눈을 뜨게 하는 동시에 유익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미적 태도설은 고정된 예술작품의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대상이 미적인 태도를 가져 보면 미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라고 하면 그 배경으로는 현대예술이 급속한 변모가 있어 예술을 정의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예술 정의의 불가능성을 이론의 하나로 하는 딕키가 그와 동시에 미적 태도설을 공격하는 것은 왜일까.〈미적 효과설의 효과에 대해서는 ‘Dickie, art c it., p.65’ 미적 태도설의 배경에 대해서는 ‘Dickie, op, c it., 85~87’〉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술관의 차이로 귀착된다. 미적인·무관심적인 태도는 감상적·심미적인 입장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거기에 딕키는 예술이 변해 갈 가능성을 내포한 현상이며 특히 도덕적인 계기를 포함해 인식의 역할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딕키의 제도설적인 표현을 말하자면 미적태도는 근대미학의 제도를 이루고 있다. 그것을 갖고 현대의 변화되어 가는 예술을 이론화하려는 것은 일종의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이다. 

[박명인 미학산책] 미적 태도론 6
[박명인 미학산책] 미적 태도론 6

 

그러나 예술작품으로 향할 때 확실히 실천적인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즉, 미적태도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반론이 끊임없이 생긴다. 여기에서 체험에 앞서 미리 문화적 제도 혹은 약속에 따라 취하는 태도와 미적 체험의 결과로 실현되는 독특한 관계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양자는 미적 무관심성과 미적 관심의 두 개의 개념과 대응한다. 

특히 어떤 태도를 이야기할 때 문제로 여겨지는 것은 결과로 실현되는 관계가 아니다. 미적태도의 개념이 미적 판단이나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무관심성 의미에 있어서 이해되어 온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미적 무관심성은 그다지 사정(射程)이 긴 것이 아니다. 자연미의 경우에는 대상의 미가 이 태도를 스스로 강요한다는 것도 있다. 그리고 미적 체험 안에 들었을 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미적 관심 쪽이다. 

미적태도를 이론화하고 규제를 강화할 때 체험을 심미적인 것으로 왜곡될 우려가 크다. 미적태도를 무관심성에 기초를 확고히 한 스톨리츠가 상술에서와 같이 관심의 계기를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또한 스톨리츠와 같이 미적 무관심성과 함께 미적 관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결코 적지 않고, 스크러톤(Roger Scruton, 1944~2020)과 같이 미적태도를 설명하면서 미적 관심에 중점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미적 관심과 미적 무관심성과는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작품의 매력에 의해 결과로 만들어지는 관심 쪽이다. 

뒤보스의 관심이 ‘방향을 전환한 inèrêt’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같은 정신으로 미적 무관심성을 규정한 것은 앙리 구이에이다. ‘관심의 역전’이라는 것이 그것이다.〈H Henri Gouhier, 1989~1994) 『연극의 본질』52쪽〉 이것은 이미 서양 근대의 지적 지배 정신을 버린 사상이다. 다시 말해, 태도가 대상을 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미나 매력이 관심을 집중하게 하는 것을 인정한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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