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지유영 기자] 디지털 이미지가 넘실대는 시대, 펜 한 자루로 10년의 시간을 꿰어온 작가가 있다. 김영화 작가의 개인전 '검은 그믓: 선이 이은 기억'이 오는 7월 31일부터 8월 18일까지 서울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25 제주갤러리 공모 선정 전시로, 제주에서의 삶과 역사, 그리고 그 땅에 깃든 기억을 펜화로 풀어낸 작가의 집요한 기록이자 애도의 제의다.
김영화 작가는 지난 10여 년간 제주 땅을 걸으며, 몸으로 체득한 기억을 펜 끝으로 옮겨왔다. 밭에서의 노동과 작업실에서의 그림 그리기를 동일선상에 두는 그의 예술 세계는, 곧 ‘삶의 방식’ 그 자체다. 여름에는 햇볕에 피부를 태우고, 겨울에는 찬바람 속에서도 붓펜을 놓지 않은 작가의 태도는 작품 전체에 묵직한 무게로 스며들어 있다.
전시작 중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그 겨울로부〉(2024, 270×1,680cm)는 제주 4·3 당시 이덕구 산전의 겨울부터 6월까지의 시간을 오롯이 담아낸 작품으로, 무려 6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또 다른 대형작 〈그들의 숲–잃어버린 마을 종남밭〉(2023)은 하루 20시간씩 반복된 그리기를 통해, 사라진 마을의 흔적을 복원하듯 풀어낸다.
작가의 펜화에는 사람의 형상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마을을 감싼 나무와 풀, 이름 없는 꽃 한 송이까지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 중에서도 나무는 중요한 상징으로 반복 등장한다. 대표작 〈맥박〉(2023)에 등장하는 오래된 퐁낭은, 마치 사람을 대신해 자리를 지켜온 존재처럼 우리 앞에 선다.
유일하게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기르는 손, 그리는 손〉(2022)과 〈멩게낭 불놀이〉(2023)에서는, 그가 기억을 손으로 길러 다음 세대로 전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기억을 ‘지속하는 몸’으로서의 작가 존재를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김영화 작가의 유일한 도구는 ‘xeno 붓펜’이다. 밑그림 없이 시작되는 그의 작업은 순간의 감각과 기억을 따라 자유롭게 흘러가지만, 완성된 풍경은 정제된 고요와 깊이를 품는다. 수천 겹의 선과 여백은 숲이 되고, 밭이 되고, 지워진 마을의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의 지형도가 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단지 시각예술의 틀을 넘어선다. 그것은 제의이며, 기록이고, 동시에 생명에 대한 애도다. 펜 끝으로 이루어진 선들은 무언의 목소리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시간을 말하고 있다.
'검은 그믓: 선이 이은 기억'은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현재의 풍경’으로서의 4·3을 사유하게 한다. 이름 없는 무덤이 남아 있는 제주 땅 위에서, 김영화 작가는 사라진 존재들과 함께 숨 쉬는 숲과 밭을 그리고 있다. 그의 그림은 말한다.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 있다”고.
이번 전시는 7월 31일(목) 오후 5시 오픈식으로 시작되며, 8월 15일(금) 오후 2시에는 작가가 직접 참여하는 전시 해설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검은 그믓(그믐)’이라는 이름처럼, 어둠을 지나 다시 밝아올 날을 향한 선의 여정을, 관람객들과 함께 마주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