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화랑 개인전 'On Paper', 140여 점의 작품으로 사유의 여정을 따라가다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김종학 화백의 드로잉 작업 전반을 조망하는 개인전 'On Paper'가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에 위치한 조현화랑에서 7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김종학의 회화 세계를 이끌어온 '선(線)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첫 학술적 기획으로,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1990년대 이전의 작업을 포함해 드로잉, 수채, 목판화 등 약 140여 점의 작품이 대거 소개된다.
전시는 1층과 2층으로 나뉘며, 1층에서는 김종학의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과 대표작 '풍경'을 중심으로 창작의 공간과 물성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2층에서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드로잉 연작이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며, 작가의 시선과 감각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구성되었다.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김종학의 대표작 '풍경'이다. 이는 그의 회화적 스케일과 자연에 대한 몰입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거대한 화면 속에서 즉흥과 반복, 선과 여백이 교차하는 긴장감을 구현한다.
작가의 창작 공간을 재현한 ‘작업실’ 역시 눈길을 끈다. 종이죽으로 만든 닭 조형물, 장갑에 그린 드로잉, 팔레트와 붓 등은 그가 일상처럼 반복한 예술적 실천을 증명한다. 이 유머와 놀이 본능이 녹아든 오브제들은 김종학 예술의 출발점이 ‘자연스러운 감각’임을 말해주며, 작업실 그 자체가 하나의 조형 세계로 다가온다.
2층 전시장은 김종학 드로잉의 시간적 흐름을 따라 구성됐다. 1960년대 초 추상 실험부터 2020년대 식물 드로잉까지, 선과 여백, 번짐과 구조에 대한 그의 탐구가 시대별로 소개된다.
1960년대 초 목판화 작업은 드로잉의 연장선으로, 형태 단순화와 직관의 리듬을 형식적 실험으로 풀어낸 시기다. 대표작 '추상'(1962)과 '역사'(1966)는 먹이라는 동양적 재료를 통해 드로잉의 자율성과 회화적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후 1978~79년 미국 체류 시기에는 도시풍경과 정물, 인물 드로잉을 통해 구상적 접근이 강화되며, 뉴욕을 배경으로 한 한지 위 드로잉은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독특한 감성을 드러낸다.
설악산으로 거주지를 옮긴 1980년대 이후, 김종학은 자연에 대한 몰입을 심화시킨다. 수채 드로잉은 그의 감각이 자연과 조응하며 즉흥성과 반복을 통해 리듬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 2000년대부터는 설경과 소나무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자연의 구조보다는 그 기운과 호흡에 집중하는 드로잉이 전개된다. 연필 드로잉의 속도감 있는 필선은 자연과의 즉각적인 교감을 선으로 치환하는 시도다.
2020년대에 들어서며 김종학의 드로잉은 실내 공간으로 향한다. 설악산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한 후, 그는 정원과 식물을 새로운 주제로 삼는다. 이 시기의 드로잉은 ‘기억을 응시하는 행위’로서, 보다 밀도 있는 여백과 정제된 선을 통해 원숙한 시선을 표현한다.
전시 마지막에는 '식물 드로잉'과 인물화를 포함한 최근작이 자리 잡았다. 선은 한층 간결하고 깊어졌으며, 오랜 세월 감각을 갈고닦은 작가의 내면 풍경이 그 안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김종학에게 드로잉은 회화를 위한 스케치가 아니라 독립된 사유의 장이다. 그의 선은 단순한 형태를 넘어 감각의 흐름이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되묻는 몸짓이다. 이번 'On Paper'는 그러한 선의 역사이자 김종학 예술 세계의 근원을 향한 깊은 여정이다.
140여 점의 드로잉과 함께 재현된 작업실, 시대를 관통하는 시선과 감각의 진화는, 관람객에게 김종학이라는 예술가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완성과 미완성, 놀이와 수행, 즉흥과 질서의 경계에서 태어난 그의 선들은 오늘도 조용히 우리를 사유의 자리로 초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