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2025' 회고전에 대한 비평적 고찰

[평론특집] 카라바조를 재조명하다-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빛
'카라바조 2025' 회고전에 대한 비평적 고찰

카라바조는 한 세기를 살았지만, 다섯 세기에 걸쳐 다시 태어나고 있다.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열린 '카라바조 2025'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신성의 경계에 선 한 화가의 고백이며, 오늘날 예술과 정체성, 그리고 진실성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던져진다.

카라바조, 카드 샤프 (1595년경). 텍사스주 포트워스 킴벨 미술관 제공
카라바조, 카드 샤프 (1595년경). 텍사스주 포트워스 킴벨 미술관 제공

1. 회화는 고백이다 -'살인의 화가', '구원의 화가'
카라바조를 둘러싼 수식어는 극단적이다. 살인자이자 천재, 거리의 방랑자이자 성화를 그린 화가.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를 단순한 신화나 전설에서 꺼내와,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전시 공간은 회화적 빛과 심리적 어둠이 교차하는 듯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관객은 한 점 한 점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대를 통과하며 화가의 내면을 순례하게 된다.
'점쟁이', '카드 샤프'와 같은 초기작은 우리가 알고 있던 젊은 카라바조의 시니컬한 재현을 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의 영혼을 꺼내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구도’는 구성이 아니라 ‘구성된 진실’이다.

카라바조, 음악가들 (159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공
카라바조, 음악가들 (159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공

2. '성 우르술라의 순교'  부활한 죽음의 이미지
이번 전시의 결정적 순간은 '성 우르술라의 순교' 앞에 섰을 때다.
이 작품은 그의 말년, 유랑과 병 속에서 그려졌지만, 죽음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빛’을 품고 있다.
복원된 색감은 놀랍도록 투명하며, 붓질은 거칠지만 정제되어 있다. 우르술라의 표정은 죽음의 공포가 아닌, 그 너머의 순결을 향하고 있다.

이 그림은 명백히, 카라바조가 자신을 위해 남긴 마지막 성화이며 자화상이다.
그의 모든 회화적 장치-어둠, 명암, 비틀린 포즈, 절묘한 주시가 한 점에 응축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회화가 인간을 구원하는 순간이다.

카라바조, 에케 호모(Ecce Homo) (1606-09). 이콘 트러스트 제공.
카라바조, 에케 호모(Ecce Homo) (1606-09). 이콘 트러스트 제공.

3. 마페오 바르베리니의 초상-미술사적 발견 이상의 의미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카라바조의 진품으로 확인된 《마페오 바르베리니의 초상》은 미술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놀라운 발견이다.

그는 훗날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되어 예술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바로크 건축과 조각을 이끈 인물이다.
카라바조는 교회를 그렸고, 이 그림은 교회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은 카리스마와 성스러움보다는, 권력과 고뇌 사이의 균열을 보여준다.
카라바조는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렸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이 살아 있는 이유다.

카라바조의 새로 복원된 성 우르술라의 순교  (1610). 사진-클라우디오 주스티. Archivio Patrimonio Artistico Intesa Sanpaolo 제공.
카라바조의 새로 복원된 성 우르술라의 순교  (1610). 사진-클라우디오 주스티. Archivio Patrimonio Artistico Intesa Sanpaolo 제공.

4. ‘주피터, 해왕성, 명왕성’ - 천장화로 본 또 다른 얼굴
빌라 오로라에 별도로 전시된 이 유일한 천장화는, 카라바조의 회화가 단지 종교적 도상학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지구적이지 않고, 우주적이며, 과학과 신화가 결합된 이 이미지들은 카라바조가 근대적 사고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주피터, 해왕성, 명왕성'은 더 이상 신들을 위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욕망, 통제할 수 없는 질서 속에서 ‘신의 자리’를 탐색하는 회화적 실험이다.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의 “Caravaggio 2025” 설치 전경. 사진-Alberto Novelli 및 Alessio Panunzi.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의 “Caravaggio 2025” 설치 전경. 사진-Alberto Novelli 및 Alessio Panunzi.

5. 전시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카라바조
카라바조는 언제나 양극단 사이에 있었다. 신과 인간, 천재와 폭력, 어둠과 빛, 사실과 환상.
'카라바조 2025'는 그를 복원하는 전시이자, 그의 양극성을 오늘날의 언어로 해석하는 시도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단지 24점의 회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의 “Caravaggio 2025” 설치 전경. 사진-Alberto Novelli 및 Alessio Panunzi.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의 “Caravaggio 2025” 설치 전경. 사진-Alberto Novelli 및 Alessio Panunzi.

"예술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카라바조는 그 답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것은 "그림자 속에서도 빛은 태어난다"는 진실이다.
“카라바조는 회화가 사유일 수 있음을, 고백일 수 있음을, 심지어 형벌이자 기도일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예술이다.”

마르코 벨리니 (Marco Bellini),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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