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비시리얼 개인전 '변화의 찬가, 실로 빚어진 생명'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프랑스 파리의 중심, 보부르 거리 30번지에 위치한 갤러리 템플론(Galerie Templon)에서 주목받는 프랑스 작가 잔 비시리얼(Jeanne Vicerial)의 개인전 '가르디엔 n°5, Nymphose'가 2025년 5월 17일부터 7월 19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잔 비시리얼 특유의 감각과 철학이 담긴 조형 작업을 통해 ‘변화’라는 주제를 다층적으로 탐구하는 장이다.

이번 전시는 ‘퍼피시옹(Pupation, 번데기 시기)’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시장 전체를 작가 본인의 “현존”으로 전환시키는 설치미술의 형태로 전개된다. 전시장 내부에는 작가의 대표적 재료인 코바늘 뜨기 기법과 검은 실로 제작된 대형 조각 작품들이 고요하고도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변화의 순간에 접속하게 한다.

조각품, 로프, 실 - 핸드메이드 195 x 85 x 72cm (76.8 x 33.5 x 28.3인치)-사진 잔 비시리얼
조각품, 로프, 실 - 핸드메이드 195 x 85 x 72cm (76.8 x 33.5 x 28.3인치)-사진 잔 비시리얼

 

비시리얼은 인간의 신체와 생명, 변화의 과정을 끊임없이 실로 직조해온 작가다. 그녀의 실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 기억과 변형을 꿰는 매개체다. 마치 고치를 둘러싸듯 조심스럽게 형체를 감싸는 실은 어느 순간 바닥으로 떨어져 물결치며 흘러내린다. 이 장면은 마치 프랑스 추상화가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의 깊고 무거운 화면에 대한 헌사처럼 느껴진다.

전시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어둡고 은은한 조명 아래의 방은, 때로는 성스러운 예배당처럼, 때로는 은밀한 침실처럼 변화된 공간 속에서 조용한 ‘재탄생’의 기운을 머금는다. 잔 비시리얼은 여기에 반식물적이며 반동물적인 초자연적 존재들  '님프(Nymphose)' 의 이미지를 투영하며, 인간 존재의 변이 가능성과 경계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녀는 말한다. “제 실은 제 눈앞에서 고치로 변합니다. 그 안에서 조각이 태어나죠. 우리는 모두 끊임없는 변신 속에 있습니다.”

조각품, 로프, 실 - 핸드메이드 - 수제 170 x 30 x 30cm (66.9 x 11.8 x 11.8인치)-사진 잔 비시리얼
조각품, 로프, 실 - 핸드메이드 - 수제 170 x 30 x 30cm (66.9 x 11.8 x 11.8인치)-사진 잔 비시리얼

 

전시장 한편 벽면에는 ‘섹스 봉헌물(Sex-votos)’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소형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검은 실 하나로 구성된 소형 조형물로, 일부는 청동과 순금이 상감되어 더욱 존재감을 더한다. 이 작품들은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곤충 혹은 외계 생명체처럼도 보이며, 사회가 숨기고 억압해온 금기와 공포-특히 시간, 쇠퇴, 죽음, 그리고 성적 취약함을 환기시킨다.

잔 비시리얼은 최근 몇 년간 미술관 전시는 물론 공연예술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022년에는 뮌헨 Maximiliansforum, 앤트워프 Ballroom Project, 파리 Maison Guerlain 등에서 전시를 가졌으며, 프랑스 베르사유 왕립오페라에서 상영된 오페라 <Atys>에서는 무대 세트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2023년에는 달릴라 벨라자의 공연 <Figures>의 의상도 제작하며,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을 넘나드는 작업의 폭을 넓혔다.

그녀의 첫 번째 단행본은 2023년에 출간되었으며, 철학자 에마누엘레 코치아와의 대담, 역사학자 이다 술라르와의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그녀의 작업 세계를 철학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조각품, 청동, 밧줄 및 실 - 수제 183 x 60 x 50cm (72 x 23.6 x 19.7인치)-사진 잔 비시리얼
조각품, 청동, 밧줄 및 실 - 수제 183 x 60 x 50cm (72 x 23.6 x 19.7인치)-사진 잔 비시리얼

 

다가오는 6월 19일부터 9월 7일까지는 프랑스의 대표적 문화 행사 ‘낭트 여행(Le Voyage à Nantes)’의 일환으로, 낭트의 복합문화공간 리외 유니크(Lieu Unique)에서 전시를 이어간다. 이번 전시에서는 철학자 클레어 마랭(Claire Marin)의 텍스트와 함께하는 협업이 예고되어, 그녀의 작업이 더욱 깊은 사유의 층위를 획득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이라는 가장 가느다란 선으로 삶과 시간, 변화와 생명, 그리고 존재의 경계를 짜넣는 작가, 잔 비시리얼. 그녀의 작품은 이제 파리를 넘어 프랑스 전역을 관통하며, 동시대 예술의 가장 민감하고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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