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론 Ⅴ
그 구상을 계승해서 예술철학의 틀로 상징개념을 거론한 사람이 미국의 미학자 S 랭거(S Langer)로써 외계에 적합한 기호와 내적 표상에 결부되는 상징을 구별한다. 다시 말해, 자연적 기호와 인공적 기호를 맞춤으로 해서 현실의 대상을 보이면서 행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에 대해 상징이란 대상이 아닌 상념(conception)을 가리키며 사고의 도구가 된다.
상징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언어로 약속한 것에 따라 개념을 나타내는 논변적인 상징이고, 또 하나는 예술이나 신화, 제식 등에서 약속의 버팀목이 되어 이 상징에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 이것을 랭거는 현시적(presentationnal)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한편 개념을 제외하는 일체의 심리적 현실을 감정이라고 보기 때문에 현시적 상징으로서의 예술의 내포는 감정이라고 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음악이 원형적인 예술이 된다.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희로애락과 같은 어떤 감정이 아니고, 단적인 심리적 현실이다. 거기에서 랭거의 감정상징설은 음악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한 슬리크의 주장과도 조화하게 된다. 〈기호와 상징의 구별에 대해서는 랭거의 『신 기조의 철학』 제3장 , 두 종류의 상징에 대해서는 제4장의 감정의 규정에 대해서 참조〉 이 이론의 골격은 완전히 근대 미학적이다. 헤르더로부터 셸링에 이르는 전술한 사상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 심신결합을 모델로 하고 자연적인 표현관계에 의해 지배된 실체적인 기호로서의 상징이며 그러한 상징의 의미가 미인 것이다.
상징은 그 표현자체가 독특한 의미 내포를 창출하는 것이며 형식과 내용이 일체화하고 있다. 그 때문에 표현에 잠시 관조적으로 응시하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내포를 체험으로 포착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알레고리는 크든 작든 약속에 의해 결합된 기호관계로써 명료한 개념을 보이고 있다. 의미 내용뿐만 아니라 기호를 만들어 내는 예술의 힘을 비교해 보아도 상징은 지극히 곤란하지만 알레고리에는 각별한 어려움이 없다.
이리하여 근대미학은 상징을 중요시하여 이것을 미의 구조적 모델로 하고 역으로 알레고리를 오성적인 것으로서 가볍게 보아 왔다. 이것에 대해 가다머(Gadamer) 는 상징미학이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알레고리의 복권(復權)을 주장한다. 그가 반증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은, E R 쿠르티우스 (Quintilianus)가 논한 중세의 문예미학과 바로크 예술이며, 이것들은 상징 미학이 전제로 하는 ‘체험 예술’과는 이질적인 것이라는 것이다.〈가다머 『진 리와 방법』 Ⅰ, 100~115〉.
가다머 이상으로 과격한 것은 혁신적인 현실 인식을 예술의 목적으로 포착한 브레히트(Brecht)나 벤자민(Benjamin)과 같은 마르크스 주의자들이었다. ‘이화(異化)’의 방법에 입각한 브레히트의 서사연극은 명백한 알레고리적이며, 벤자민은 바로크 연극의 알레고리가 갖는 인식효과를 중요시한다.(브레히트가 서사적 연극이라고 한 것은 명료한 인식을 구하는 점에서 알레고리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인용(引用)’의 수법이나 ‘inter text성’을 강조하는 조류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상징개념을 생각할 때, 처음부터 근대인의 의식의 구성계기로서 본질적인 이중성이 존재한 것, 다시 말해, 이념과 현실의 괴리 의식이 근대인을 성격 짓고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환언하자면, 알레고리가 근대인의 의식의 현실인 것에 대해 상징은 회복해야 할 이상(理想)이라는 성격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가다머가 제시하고 있었던 알레고리의 사례는 과거 지향적이었지만 문제는 예술미의 상대성 혹은 다양성이다. 이 점에서는 예술사보다 새로운 시기에서도 상징과는 이질적인 예술관을 인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음렬주의(音列主義) 음악이나 추상회화를 예로 들어, 순수하게 감각적 차원에 멈추는 예술로 상징과 같이 이념적인 차원을 결여하고 있다고 하면서 본연의 자세를 기호와 상징과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전위적인 예술의 새로움은 무엇보다 예술관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순수하게 감각적인 예술이 새롭게 만들어졌을 때,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즉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구래(舊來)의 예술관을 대했을 때에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 배후에 있는 예술관, 즉 광의적인 기호로서 작품을 성립되게 하고 있는 코드를 포착했을 때 처음으로 그 작품을 ‘알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고, 그때 처음으로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이 구조는 모든 기호와 상징에 공통적이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적용되는 코드가 공통 이해로 존재를 각별히 자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호나 상징은 우선 그 입수자에 대하여 어떠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어떠한 코드를 적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프레그메틱한 차원이 있다. 프레그메틱 차원을 시야에 넣은 상징개념으로서 문화인류학자 스퍼버(Dan Sperber, 1942~)를 들 수 있다. 그가 상징체(symbole)가 아니라 상징현상(symbolisme)를 문제 삼는 것은 ‘상징성은 대상ㆍ행위ㆍ발화의 특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술하고 해석하는 개념적 표상의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단순한 개념적 파악에 실패했을 때, 상징적 해석이 수용되어 적절한 이해가 생기는 것이 그 구조이다.〈Dan Sperber, le Symbolisme en gnral, pp. 124~25(『상징표현이란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