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류조각가의 삶의 파괴로 만들어진 예술

“까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조수이자 제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위태로운 조각적 감수성을 지닌 독립된 예술가였다.”

                                                      - 로댕 미술관 공식 평가 (Musée Rodin, Paris) 출처: Musée Rodin, 공식 도록 

『Camille Claudel, L'autre regard』(2017 재발간판)

까미유끌로델-그녀는 아름다운 조각가를 말하는 이름이 되었다.
까미유끌로델-그녀는 아름다운 조각가를 말하는 이름이 되었다.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북부 에즈비뉴르(Aisne)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한 소녀가 태어났습니다.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훗날 19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도 가장 비극적으로 사라진 이름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흙과 돌을 만지며 조각에 몰두했고, 가족들조차 놀랄 정도로 입체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여동생과 동생인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폴 클로델은 그녀의 천재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한 인물이었습니다.

16세의 폴 클로델 ; 나의 동생, 카미유 클로델,  오귀스탕 미술관
16세의 폴 클로델 ; 나의 동생, 카미유 클로델, 오귀스탕 미술관

 

“그녀는 신의 손끝이 닿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은 끝내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다.”

- 폴 클로델 (Paul Claudel, 시인·동생)  출처: 1914 (개인 서신 및 유고에서 정리된 구절)

31, 대로 뒤 포르루아얄, 폴 클로델 과 그의 여동생 카미유 클로델이 1886 년부터 1892년까지 파리에 살았던 건물.폴 클로델은 누이의 천재성을 일찍부터 인정했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후에도 내면으로 깊은 죄책감을 가졌던 인물이다.
31, 대로 뒤 포르루아얄, 폴 클로델 과 그의 여동생 카미유 클로델이 1886 년부터 1892년까지 파리에 살았던 건물.폴 클로델은 누이의 천재성을 일찍부터 인정했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갇힌후에도 내면으로 깊은 죄책감을 가졌던 인물이다.

 

클로델의 흙인형놀이 - 진흙 덩어리를 빚던 어린 시절

까미유 클로델은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며 형상을 빚는 데 몰두했습니다. 여느 아이들이 인형을 갖고 놀 때, 그녀는 진흙 덩어리로 사람의 얼굴과 손가락 마디, 심지어는 말의 근육 구조까지 흉내 냈다고 합니다. 마당에서 파낸 찰흙을 굳혀 조각을 만드는 데 몰두하다, 어머니의 옷감을 망가뜨리거나 부엌 도구를 몰래 써서 혼난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의 손끝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결국 파리로 보낼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 아이는 손으로 말하는 아이야. 흙을 놓치면 말을 잃을지도 몰라요.”라고 그가 중얼거렸다는 말이 가족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초상화, 비룬 1883 / 생일 1864년 12월 8일 사망일 1943년 10월 19일 / 로댕 미술관은 그녀를 더 이상 로댕의 부속 인물로 보지 않고, 독립적인 조각가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1881년, 17세의 나이로 파리로 건너간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아카데믹한 조각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콜로시 여성 아틀리에(Académie Colarossi)에 등록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앙리 샤퓌(Henri Chapu) 등의 조각가들에게 배우며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고, 곧 로댕의 눈에 띄게 됩니다.

까미유의 뎃생
까미유의 뎃생

 

로댕과의 만남 – 예술과 충돌의 시작

1882년경, 클로델은 파리의 여성 아틀리에에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1884년 로댕의 대형 프로젝트 ‘지옥의 문’의 조수 겸 모델로 채용됩니다. 로댕은 그녀의 드로잉 실력과 인체 해부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클로델은 처음으로 자신의 손끝이 진짜 예술 안에서 역할을 한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고 전해집니다.

카미유 클로델이 만든 로댕 흉상
카미유 클로델이 만든 로댕 흉상

 

두 사람은 빠르게 예술적, 정서적 교감을 나눴고, 20세였던 클로델은 43세였던 로댕과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로댕은 그녀를 ‘까미유’가 아닌 ‘작가 클로델’로 대하며 그녀의 개성을 인정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그림자 속에 두려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입니다. 훗날 이것이 불행을 일으키게 될 시그널이 되는데 말이죠. 클로델은 로댕이 자신에게 한때 “나의 여왕이자, 내 오른팔”이라고 불렀던 것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회상했지만, 동시에 가장 무너졌던 시간으로도 기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884년, 로댕은 까미유를 자신의 조수로 고용했으며, 그녀는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들’ 같은 대작의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카미유 클로델과 제시 립스콤(오른쪽), 1887
카미유 클로델과 제시 립스콤(오른쪽), 1887

 

로즈 뵈레와의 갈등 – 침묵과 충돌 사이

로즈뵈레 - 그녀는 평생 로댕에게 헌신하고 모든 고통에 침묵으로 응대했다.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가 깊어지던 무렵, 로댕의 오랜 동반자인 로즈 뵈레(Rose Beuret)는 이를 직감하게 됩니다. 로즈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자주 로댕의 작업실 근처를 맴돌았고, 까미유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한 행동을 했다는 증언도 남아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로댕의 작업실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로즈가 까미유와 마주친 장면입니다. 로즈는 침묵 속에 클로델을 바라보았고, 클로델은 작업 도구를 쥔 채로 몇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굳어 있었습니다. 이 짧은 대면 이후 까미유는 작업실에서 점점 멀어졌고, 결국 독립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진 않지만, 로댕 주변 인물들의 회고와 클로델의 편지를 통해 자주 암시되는 갈등 구조입니다.

 그녀는 로댕에게 단지 조수나 모델이 아닌, 예술적 동반자였습니다. [발망시옹의 머리], [왈츠], [중년] 같은 클로델의 대표작들은 로댕의 스타일과 닮아 있으면서도, 훨씬 더 감정적이고 내면적인 긴장감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인물들은 고통이나 욕망보다 그 경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침묵에 집중했습니다. 로댕이 형상을 통해 외부로 표출되는 감정을 조각했다면, 클로델은 형상 내부에 웅크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했습니다.

 까미유끌로델 박물관 Nogent-sur-Seine
 까미유끌로델 박물관 Nogent-sur-Seine

 그러나 이 창조적 긴장은 곧 감정적 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로댕과 클로델의 관계는 몇 년간 격렬했지만, 로댕은 오랜 동반자인 로즈 뵈레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고, 클로델은 점점 그의 그림자에 갇혀 가는 예술가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술가이자 연인이었던 그녀는, 결국 로댕의 조각에서 빠져나와 자신만의 형식과 언어를 구축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술계는 여성 조각가에게 너그럽지 않았고, 그녀의 독립은 자립이 아닌 고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905년, 그녀는 파리 살롱에서 개인전을 열고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작품 [중년(L’Âge mûr)]은  젊은 여인이 중년의 남성과 나이 든 여성 사이에서 절규하듯 손을 뻗는 형상을 조각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로댕과의 관계를 은유한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작가의 자아고백성 작품입니다. 그녀의 비참한 감정을 표현한 예술이 폭발한 대표작으로 남았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의 대표작"중년" 나이 든 중년 남자를 늙은 마귀같은 여자가 끌고 떠나려고 한다. 그 뒤에 간절히 무릎꿇고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이 까미유의 애절함을 느끼게 해준다.
까미유 끌로델의 대표작"중년" 나이 든 중년 남자를 늙은 마귀같은 여자가 끌고 떠나려고 한다. 그 뒤에 간절히 무릎꿇고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이 까미유의 애절함을 느끼게 해준다.

 

로댕의 ‘작품 표절’ 주장 편지 사건

1906년경,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아이디어와 스케치를 무단으로 작품에 사용했다며 프랑스 미술계에 편지를 돌린 일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편지에서 로댕이 자신의 조각 중 일부를 ‘참조 수준을 넘게 차용’했다고 주장했으며, 로댕의 작품에 ‘나의 심장과 손끝이 들어 있다’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공식 대응은 없었지만, 예술계 내부에서는 ‘클로델의 정신이 불안정해졌다는 증거’로 악용되었고, 그녀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습니다.

사랑에서 증오로 증오는 자기파괴로

카미유 끌로델의 '왈츠' (로댕 미술관) ​​​​​​​로댕과의 영원한 행복을 꿈꾸던 까미유는 어쩌면 조각가이기전에 한 사람의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단지 사랑을 원하는...
카미유 끌로델의 '왈츠' (로댕 미술관) 로댕과의 영원한 행복을 꿈꾸던 까미유는 어쩌면 조각가이기전에 한 사람의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단지 사랑을 원하는...

이후 그녀의 작품 세계가 무르익을수록, 세상은 점점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가족, 특히 어머니는 그녀의 예술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불행하게도 로댕과의 관계를 수치로 여겼습니다. 1913년의 어느 날, 그녀의 동의도 없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됩니다. 평생 그녀를 지지하던 동생 폴 클로델조차도 이 결정에 침묵했으며, 참담하게도 까미유는 이곳에서 30년 넘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녀의 청춘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이 결정은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방관자로서의 죄책감을 안겨줍니다. 그녀는 병원에서도 계속 작업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흙과 도구를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요청이 거부당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서서히 사라졌고, 기억도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병원이 한 아름다운 예술가의 영혼과 육체를 망치고 시간을 도둑질해 버린 인류 미술사의 몇 안 되는 비참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카미유 끌로델의 샤쿤탈라 .제작 시기: 1886년경,  왕 두쉬얀타(Dushyanta)와 숲속의 처녀 샤쿤탈라의 운명적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를 그린 서정적 희곡 ,  까미유는 이 작품을 나중에 [L’Abandon(버림, 유기)]이라는 제목으로도 발표합니다. 
카미유 끌로델의 샤쿤탈라 .제작 시기: 1886년경,  왕 두쉬얀타(Dushyanta)와 숲속의 처녀 샤쿤탈라의 운명적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를 그린 서정적 희곡 ,  까미유는 이 작품을 나중에 [L’Abandon(버림, 유기)]이라는 제목으로도 발표합니다. 

 

흙으로 만든 ‘숨겨진 작품들’

정신병원 수용 후에도 그녀는 몰래 조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병원 기록에 따르면, 까미유는 식사 중 남은 빵을 손에 쥐고 눌러 사람의 얼굴과 동물 형상을 만들었고, 창틀 아래 숨기거나 이불 밑에 넣어두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병원 간호사들은 “그녀는 흙이 없는 대신,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을 조각처럼 다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녀의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내면을 보며 안타까움에 마음 아파지는 것은 그녀의 우수에 찬 사진을 보며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보낸 시간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낸 것은 어머니와 남동생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녀를 지지하고 있었던 아버지는 입원 결정 직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병원 측은 그녀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하지 않았고, 까미유는 “아버지가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라는 말을 수년간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까미유에게 유일한 탈출구이며 영원한 자신의 보호자였나 봅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유족 서신과 병원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으며, 그녀가 정신적으로 무너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기다림의 배신’이었다는 해석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감옥에서 해방을 기다리며 아버지의 구원을 애타게 그리던 그녀의 시간을 회상해 보며 더 가슴 아픈 심정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자신감-까미유 클로델, 제네바 미술관
자신감-까미유 클로델, 제네바 미술관

 

1943년, 까미유 클로델(1864년 12월 8일 ~ 1943년 10월 19일 향년 79세)은 남프랑스의 한 정신병원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로댕에 대한 감정을 말로 끝맺지 못하고, 작품 중 일부는 직접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사후 수십 년이 지난 뒤, 그녀의 작품은 재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L’Abandon 라바그, 까미유끌로델, 로댕 미술관, 1886년경
L’Abandon 라바그, 까미유끌로델, 로댕 미술관, 1886년경

 

1984년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클로델 단독 회고전이 열렸고, 2005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건 ‘까미유 클로델 미술관(Musée Camille Claudel)’이 그녀의 고향인 노장쉬르센에 개관되었습니다. 그녀를 노년에라도 해방시켜 주었다면 우리 모두가 방관자적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녀의 최후를 보며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Cloto, Camille Claudel , 1893.그녀의 조각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슬픔이 조각되어 있다.
Cloto, Camille Claudel , 1893.그녀의 조각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슬픔이 조각되어 있다.

 

이제 그녀는 로댕의 그림자가 아닌, 고통을 조각한 여성 예술가의 독립된 이름으로 역사 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로댕이 인간의 고뇌를 조각했다면, 클로델은 고뇌로 인해 부서져 가는 형상 자체를 조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완성된 아름다움보다는, 아름다움이 파괴되기 직전의 불안과 떨림을 담고 있었으며, 그 흔들림은 오히려 더 오랫동안 감정을 붙잡는 형상이 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온몸과 예술로 소리친 다른 예술가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일개 가십으로 넘기지 말고 교양이라는 지식으로 치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오늘 까미유의 삶에 공감해 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강민수 작가  -  총 평

 프랑스 보클뤼즈 아비뇽 몽파베 묘지에 있는 카미유 클로델의 기념비
 프랑스 보클뤼즈 아비뇽 몽파베 묘지에 있는 카미유 클로델의 기념비

 오늘날 우리가 까미유를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녀의 착한 심성과 아무 힘 없던 저항의 몸부림을 스스로 파멸에 쓴 것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을 외면하고 버려두어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실제 로댕은 하나뿐인 아들조차도 책임지려 하거나 경제적인 후원도 하지 않았다.) 옛 연인에 대한 복수보다 자신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한 순수한 영혼의 아프로디테, 눈부신 재능을 인정받지도 펼쳐 보지도 못했던 한 여성 작가의 모습, 뒤늦은 미안함으로 그녀를 우리 시대에 기념하는 것에 대한 허탈함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방관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이 사회 곳곳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허들을 만드는 모습들. 그 속에서 양보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무시하는 모습을 통한 자기 우월감. 그 모든 것도 결국은 누군가의 아픔을 먹고 자란 기형적 성장의 “성공나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강자들이 약자를 깔보고 무시하는 순간, 그들의 승리는 이미 부끄러움으로 얼룩져 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 1951)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30년은 우리가 나눠 가져야 할 미안함의 몫입니다. 손쉽게 이야깃거리로만 나누려 한다면 또 다른 가해자와 방조자가 된다는 생각이 시대의 예술적 양심의 소리일 것입니다.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이런 아픔의 메아리를 우리에게 끝없이 들려주는 스피커와 같습니다. 까미유는 결국 우리 곁에 영원히 남은 아픔의 조각이며 숭고하고 힘없이 착해서 누군가를 해하지 못했던 패자의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 승리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묻고 있는 삶의 청구서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게 까미유를 추모합니다.

 

1988년 작 영화 [까미유 끌로델]  감독:브루노 누이땅, 이자벨 아자니(끌로델역), 제라르 드빠르디유(로댕역) 이 작품으로 이자벨아자니는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세자르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4k 2019년 복원버전이다. 영화를 꼭 보길 추천한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로댕의 조수를 넘어선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을 만납니다.고전의 무게를 통해 근대 조각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프롤로그 

 

강민수작가,홍익대학교조소과,홍대교육학석사,조각가,조각전문저널리스트
강민수작가,홍익대학교조소과,홍대교육학석사,조각가,조각전문저널리스트

 “클로델은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린 여성 조각가의 원형이다. 그녀의 작품은 감정이 형상으로 응결된 결정체다.”     

  -  리네 르무안(Lyne Lemoyne, 미술사가)

강민수의 '파르락시스'는 조각가와 예술을 통해 형상의 진동을 읽어내는 저널입니다. 이 코너는 조각가의 생애와 시대, 그리고 그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하며, 대중과 전문가의 눈으로 조각 예술의 본질과 의미를 탐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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