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예술을 철학의 경지로! 세기의 거장 오귀스트 로댕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위대한 예술가의 태동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로댕은 태어났습니다. 오귀스트 로댕, 훗날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어린 로댕은 숫자나 문자를 이해하는 데는 서툴렀습니다. 하지만 미술적 소질은 일찍부터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집의벽, 마룻바닥, 심지어 가구 뒷면까지 온 집안을 온통 그림으로 채우곤 했습니다. 하루는 마당의 돌 위에도 무언가를 새기다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타박하고 꾸중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들의 손끝에 담긴 집요함을 눈여겨보았다고 전해집니다. 우리 어린시절 화가들의 아버지들 모두에게 듣던 ‘환쟁이’‘밥 굶기 좋은 직업’은 보수적인 옛 아버지의 흔한 모습인 듯 합니다.
로댕은 14세가 되던 해, 파리 국립 장식 미술학교(École Spéciale de Dessin et de Mathématiques)에 입학했습니다. 처음에는 화가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풍경과 인물을 스케치하며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는 색을 구분하는 데 있어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색약(色弱)이었던 것입니다. 명암은 정확했지만, 색채는 그에게 늘 어딘가 모호하고 낯선 영역이었습니다. 그는 좌절하고 방황했지만 그때 그를 눈여겨보며 방향을 잡아준 인물이 있었습니다.
장식미술학교의 조형 교수였던 호라스 르코크 드 부아보동(Horace Lecoq de Boisbaudran)선생님 입니다. 그는 기억에 의한 드로잉 훈련과 내면 관찰을 중시한 교육자로, 제자들에게 감각을 눈이 아닌 감정과 손끝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로댕에게 남긴 영향은 예술 자체의 전환이었습니다. “색은 눈을 속일 수 있지만, 형태는 손을 속이지 않는다. 너는 색이 아니라 빛과 입체를 보는 사람이야.” 이 말은 로댕에게 처음으로 조각이라는 세계를 열어줍니다.
그는 곧 조각 전공으로 방향을 틀었고, 형태를 손으로 빚는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미켈란젤로 이후 최고의 예술가 로댕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가 된것이었습니다. 화가로서의 길이 막히자 색약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그에게는 최고의 행운이 되었던 셈입니다. 후에 이런 불행은 로댕에게 다시 큰 행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17세가 되던 해, 로댕은 프랑스 최고의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지원했지만 낙방했습니다. 형태 감각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이유였습니다. 이후 세 차례나 더 도전했으나 끝내 입학에는 실패했습니다. 벽을 넘지 못한 청년 로댕은 곧 장식조각가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가 느꼇을 좌절감과 고통은 긴 밤의 터널로 진입하여 그에게 조각 하청 노동자로, 이름 없는 시간으로 한 없이 인도합니다.
이름없이 조각을 만드는 노동자
로댕은 생계를 위해 석재 세공, 장식 부조 복제, 공공건축물 외벽 장식물 제작 등 다양한 하청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고된 조각 노동에 시달리며 그는 예술가라기보다는 기술자에 가까운 노동자로 분류되었으며,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도 없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 고된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였습니다. 손은 움직였지만, 가슴은 울지 않았습니다.”(Émile Bergerat와의 대담, 1911)
이탈리아 잠든 로댕을 깨우다
이러한 그에게 큰 전환점이 다가옵니다. 바로 1875년 이탈리아 여행이었습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거치며 그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대면하며 그는 숨이 멎을듯한 감동에 빠져듭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피렌체의 다비드상 앞에서 그는‘돌이 살아 있었다!.’며 그 전율의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신을 새겼습니다. 나는 그의 발자취를 쫓기 위해 평생을 보냈습니다.”(Paul Gsell, 『L'Art: Entretiens avec Rodin』, 1911) 그리고 그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거장이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평가입니다.
의혹을 돌파하고 영원한 명성을 새기다 – [청동시대]
귀국 후 발표한 (청동시대-1877)는 로댕에게 두 번째 탄생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파리 살롱(Salon de Paris)에 출품했고, 그것은 단순한 누드 조각이 아닌, 살아 있는 남성을 정지된 육체 안에 봉인해둔 듯한 조형이었습니다. 대리석이나 청동으로는 감히 담기 어려운, 숨소리까지 들릴 듯한 진동이 피부와 근육에 살아 있었고, 손끝에서 복부로 이어지는 곡선, 발바닥에 닿은 체중의 미묘한 기울기까지 정교하게 조각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너무도 생생하고 사실적이라는 이유로, 관람자와 비평가들 사이에서 의혹이 퍼졌습니다. “이건 모델에게 석고를 떠서 몰래 주조한 것 아니냐”, “이건 조각이 아니라 속임수다”라는 비난이 일었습니다. 일부 교수와 평론가는 조형의 윤리를 문제 삼았고, 일부는 로댕의 기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는 로댕이 형식미가 중심이던 당시 조각계에서 얼마나 독보적인 접근을 했는지를 반증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로댕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혹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시연회를 열었습니다. 장소는 파리 중심의 아틀리에였고, 불편한 기색의 예술가들과 교수들, 기자, 제자들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작품의 모델이었던 청년 장 바티스트 클레망이 무대에 섰고, 로댕은 그의 몸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조각과 실물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어깨의 각도, 팔의 회전, 복부의 긴장, 눈꺼풀 아래 미세한 골격의 구조까지 증명합니다.
특히 그의 교육 시절 한 차례 자신을 낙방시켰던 보자르 교수들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완전한 사실주의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누군가는 작품 쪽을 한참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시연은 단순한 해명이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진실을 증명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사건은 오히려 로댕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청동을 깎는 손보다, 의혹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가 더 큰 울림으로 전해졌고, 이 작품은 그에게 ‘사실주의 조각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옥의 문]에서 탄생한 세기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
— 그를 마침내 전설로 만들다
1880년, 로댕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파리 장식미술관’의 입구를 장식할 대형 청동문, 『지옥의 문』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이 문은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욕망, 죄, 심판, 회한을 형상화하는 대작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로댕은 이 주문을 받은 순간부터, 평생 이 문 앞을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한 조각가의 시간과 노동, 철학이 고스란히 이 문에 녹아들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단테 자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문 가장 윗부분에 앉아 아래의 지옥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물은 곧 단테를 넘어서는 상징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짓눌리고 있었습니다. 깊은 사유는 곧 고통이고, 인간 존재를 스스로 묻는 자기 해체의 시간이었습니다. 로댕은 단지 머리를 감싸 쥔 철학자를 조각한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생각하는’ 육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등은 굽었고, 주먹은 깨물듯 쥐어져 있었으며, 발끝까지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눈으로는 응시하고 있지만, 실은 내면을 향해 침잠하는 자세였습니다. 조각이 관조를 넘어서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이 인물은 단테가 아니라 인류 그 자체가 되었고, 로댕의 손끝에서 그 정체성을 얻은 순간 독립적인 조각으로 분리되어 나옵니다.
1904년, 생각하는 사람은 드디어 단독 작품으로 공개되며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신을 닮은 인간”이 아닌 “질문하는 인간”, “고뇌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이 조각은 단숨에 로댕을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지드는 이 작품을 보고 “신이 창조를 멈춘 자리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빚고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리하르트 뮐러는 “이 조각은 조용한 외침이다. 조각이 침묵 속에 얼마나 큰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념비”라 말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생각하는 사람은 전 세계 수십 곳에 복제되었고, 비탄의 포즈가 아니라 인간 사유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 놓인 우리들의 군상 – [칼레의 시민들]
1884년부터 1895년까지 그는 칼레의 시민들을 작업했습니다.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도시 칼레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시민 여섯 명의 희생을 다룬 작품으로, 기존의 영웅적 조각과는 달리 절망과 두려움, 체념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델들과 함께 동작과 표정을 연구하며, 모두가 주인공이면서도 집단 속 개별적인 존재로 빛나는 구성을 시도했습니다.
예술과 감정, 그리고 갈등 – 까미유 클로델과 로즈 뵈레
이 시기 로댕은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과 강한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조수가 아니라 로댕의 조형 언어를 자극하고 확장시킨 파트너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로댕의 관계에는 늘 로즈 뵈레(Rose Beuret)의 존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로즈는 1864년부터 로댕과 함께한 동반자였고, 현실과 일상을 지탱해준 인물이었습니다. 클로델은 열정이었고, 로즈는 침묵이었습니다.
갈등은 결국 터졌습니다. 한 번은 로즈가 예고 없이 로댕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클로델과 마주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평소 조용하던 로즈가 이 날은 크게 격앙되었고, 클로델은 분노한 채 자리를 떠났습니다. 로댕은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 이후 클로델은 작업실을 떠났고, 로댕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습니다. 클로델은 독립 예술가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당시 여성 조각가의 위치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그녀는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로댕은 그녀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후기작들에는 파편적인 감정과 미완의 흔들림이 자주 나타납니다.
명성의 정점과 마지막 약속
1899년, 그는 파리에 작업실과 전시공간을 마련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개인 전시관을 운영하며 세계적 명성을 이룩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 그는 이미 노년에 접어든 상태였습니다. 1916년, 그는 자신의 작업과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유언장을 남겼고, 같은 해 프랑스 정부는 로댕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로댕의 예술이 프랑스 문화정신 그 자체로 평가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은 180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창설한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으로, 예술, 과학, 정치,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에 현저한 공헌을 한 인물에게 수여됩니다. ‘가장 프랑스적인 업적에 대한 가장 영예로운 찬사’로 여겨지며,로댕은 1916년 사령관 등급(Commandeur)으로 서훈되었습니다.]
유언처럼 남은 결혼, 조용한 마무리
1917년 11월 17일, 로댕은 뫼동(Meudon) 자택에서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사망하기 전, 오랜 동반자 로즈 뵈레와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이는 로댕의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유언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병상에서 “로즈와 결혼하거라. 그 여인은 평생 너를 돌보았지 않느냐”라고 당부했다고 전해집니다. 로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평생토록 결혼을 거부하다 생의 마지막에 가까워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오귀스트 외젠 뵈레(Auguste-Eugène Beuret)가 있었지만, 로댕은 생전에 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유산에서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고뇌의 조각, 불완전한 인간을 위한 예술
프랑스 평론가 루이 킬로는 로댕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는 대리석 속에 고뇌를 봉인한 조각가였습니다.”(Louis Gillet, 1924) 로댕은 조각의 완성도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상 속에 감정을 담았으며, 조각의 완벽을 추구하기보다 인간의 내면 불안과 삶의 깊은 고뇌를 조각한 거장이었습니다. 필자는 예고시절 로댕의 인간박물관이라는 책을 읽으며 조각입시를 준비하던‘미술학도’시절부터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조각이며 그의 그림이 일기이고 그의 조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다!라고 감히 저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로댕이 담으려던 삶과 죽음과 사랑과 고독을 가진 무한한 우주같은 존재니까요. 오늘날도 로댕의 이야기와 예술은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줍니다. 그는 그 자체로 인간박물관이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로댕의 연인, 까미유 클로델을 만납니다.로댕의 그림자에서 평생, 홀로 서려 고통을 조각과 마음에 새긴 비운의 여류작가 클로델의 슬픈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로댕은 대리석 속에 고뇌를 봉인한 조각가였다.”
루이 킬로 (Louis Gillet, 프랑스 예술비평가)
강민수의 '파르락시스'는 조각가와 예술을 통해 형상의 진동을 읽어내는 저널입니다. 이 코너는 조각가의 생애와 시대, 그리고 그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하며, 대중과 전문가의 눈으로 조각 예술의 본질과 의미를 탐색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