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현 화업 50주년, 명예퇴직 이후 서울에서 열한 번째 개인전 개최
변재현 작가, 민족의 정신을 품은 ‘소나무 회화’의 집성
[아트코리아방송 김한정 기자] "소나무는 노래하지 않아도 춤을 춘다. 그것은 보여지는 아리랑이다."
올해 화업 50주년을 맞이한 서양화가 변재현의 이 한마디는 그가 평생 화폭 위에 새겨온 예술적 태도와 민족적 미학의 총체를 함축한다. 지난 4월 9일부터 14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송아리랑'은 작가의 열한 번째 서울 개인전이자, 나주대학교에서 오랜 기간 미술교육에 헌신한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의 궤적을 집대성하는 의미 깊은 자리였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 연작인 '삼송 아리랑'을 비롯하여 '솔바람', '송음' 등 약 60점의 소나무와 꽃 그림이 전시되었다. 소나무 40여 점은 모두 그가 지난 수년간 전국의 소나무 군락지를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심상을 되새겨 구성한 작품들이다.
변재현은 40대 후반, 회화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고민 끝에 ‘소나무’를 평생의 테마로 삼았다. 이후 그는 학문적으로도 소나무 회화에 대한 박사 논문을 집필하며, 회화의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작가적 궤도를 걸어왔다.
소나무는 그에게 있어 단순한 자연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지조와 절개, 포용과 강인함, 유연함과 상승의 기운을 동시에 품은 민족적 자화상이다. 특히 그는 한국적 곡선미, 비기하학적 질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소나무의 ‘형태미’를 통해 집단 무의식 속의 한국인의 심성을 조형적으로 부각한다.
‘송아리랑’이라는 시리즈명은 두 개념의 절묘한 결합이다. ‘송(松)’은 소나무이고,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한민족의 정한(情恨)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이다. 변 작가는 ‘나 아(我)’, ‘다스릴 리(理)’, ‘즐거울 랑(朗)’이라는 한자의 조합으로 ‘나를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해석하며, 자아의 회복과 민족적 정서의 회화를 동시에 구현하려는 미학적 시도를 지속해 왔다.
변재현 작가는 화단에서만 활동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평생을 미술교육자이자 이론가로 살아왔다. 나주대학교에서 미술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기표현의 근원으로서의 회화’를 강조했고, 스스로도 현장 연구와 이론 연구를 병행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 화단에서 소나무 회화가 어떻게 조형화되고 철학화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기념전이 아니다. 소나무 회화의 상징성과 조형성을 민족적 콘텍스트로 확장해온 50년의 조형적 탐구에 대한 종합보고서다. 작가는 실제로 지리산, 무등산, 경주 남산 등의 소나무 명소를 순례하며 각각의 ‘나무의 생애’에 집중했다. 그는 “크게 휘어진 소나무일수록 더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처 입은 곡선의 미학은 그가 말하는 ‘휘고 꺾였지만 꺾이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작품 '삼송 아리랑'에서는 소나무 세 그루가 서로를 껴안고 춤추듯 엮인다. 이는 단지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은유이며 민족적 리듬의 시각화다. '솔바람' 연작에서 수평선 위로 흩날리는 소나무들은, 강한 바람 속에서도 유연하게 흔들리며 서로를 지탱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 바람은 어쩌면 격랑의 현대사일 수도, 이민족의 외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나무는 그 안에서도 서 있는 법을 안다. 그것이 바로 변재현이 말하는 ‘보여지는 아리랑’이다.
현재 작가는 전국의 소나무 명소를 기록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강원도에서부터 제주까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소나무를 주제로 한 작업을 5년간 이어가고, 자신의 칠순을 맞아 ‘대한민국 소나무 아카이브 화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미술 작업을 넘어, 지역성과 민족성의 미학을 시각문화로 집대성하려는 작업이다.
변재현의 작업은 단순히 ‘잘 그린 소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자, 회화가 사유를 담아낼 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그는 말한다. “어떤 날엔 새 소나무를 만나면 마치 벗을 만난 듯 설렌다.”
그 감정이야말로 화가로서 살아온 자의 특권이자, 예술가의 윤리이며 동시에 그의 예술이 가진 ‘인간적 신뢰’다.
굽고 비틀린 삶일지라도 꺾이지 않고 춤을 추는 소나무처럼, 변재현의 화폭은 오늘도 소리 없이 울리고 있다. 이 울림은 곧 우리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