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획이 만 획이요, 만 획이 일획으로 돌아간다.”
성원선 (미술평론가)

'일획, 무한의 시작 – 임상빈의 일획 시리즈에 관한 미학적 성찰'
“일획이 만 획이요, 만 획이 일획으로 돌아간다.”
성원선 (미술평론가)

동양 회화의 대가 석도(石濤)는 단 한 획에 우주의 이치를 담았다. 이는 단순한 선 하나가 아니라, 세계를 여는 첫 숨결이며, 회화가 존재론적 깊이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임상빈의 ‘일획’ 시리즈는 이 고전적 철학을 토대로, 오늘날 사회와 관계에 대한 사유를 회화로 던진다.

그의 화면 위에서 하나의 붓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각각의 획은 방향도, 속도도, 색도 다르며 마치 제각기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자신만의 호흡과 결을 드러낸다. 이 다채로운 흐름은 복수성과 단일성이 공존하는 리듬 위에 놓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감각을 넘어 정신의 깊이로 이끈다. 임상빈의 작업은 이 순간, 칸트가 말한 ‘무목적적 합목적성’, 즉 어떤 목적도 없지만 조화로운 질서가 느껴지는 그 독특한 미학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우리는 무엇인지 말할 수 없지만, 분명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 속에서 그의 붓질을 바라보게 된다.

Sangbin IM, One Stroke 6.10, 40.9x31.8cm, 2025-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Sangbin IM, One Stroke 6.10, 40.9x31.8cm, 2025-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그 하나의 붓질은 꽃처럼, 바람처럼, 파도처럼, 수풀처럼, 도시처럼, 군중처럼 그 하나 하나가 일어서고 연결된다.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개념은 형체를 갖기 이전, 말해지기 전의 세계를 상징한다.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기 직전의 본질, 가능성과 에너지의 흔적이다. 그는 각 붓질을 초상화처럼 여긴다. 작가에게 있어 각 획은 제자와 같다. 상상력을 통해 길러지고 훈련되어, 결국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간다. 그렇게 한 획 한 획은 고유한 생명력을 얻고, 작가의 손에서 벗어나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이 과정에는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그가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써 창조의 윤리이자 책임감이다.

Sangbin IM, One Stroke 6.12, 40.9x31.8cm, Acrylic on canvas, 2025-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Sangbin IM, One Stroke 6.12, 40.9x31.8cm, Acrylic on canvas, 2025-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임상빈의 작품은 철학적 사유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칸트의 인식론뿐만 아니라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이르기까지, 그는 동양의 감각적 미학과 서양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조율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된 존재’와 ‘기투된 존재’는 작가가 그리는 획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 획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자, 그 존재가 다시 세계에 의미를 던지는 기호가 된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초끈이론의 이미지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진동이 하나의 선으로 구체화되는 장(場)을 이룬다. 각 획은 물리적 실체이자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의미망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현(現)이며, 회화는 그렇게 미시적인 차원의 존재들이 얽혀 있는 우주의 단면처럼 펼쳐진다.

Sangbin IM, One Stroke 105,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24-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Sangbin IM, One Stroke 105,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24-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되, 감각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임상빈의 회화는 이 보이지 않는 리듬, 세계의 진동을 붓질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내는 일종의 시적 실천이다.

그에게 있어 첫 획은 우주의 빅뱅과 같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내려진 그 첫 붓질은, 무(無)에서 유(有)가 태어나는 찰나이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시작이다. 임상빈은 이러한 우주의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각 작품을 서로 다른 세계이자, 동시에 연결된 다중 우주의 일부로 상상한다. 색과 선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상상력, 존재에 대한 물음을 품은 상징이 된다.

Sangbin IM, One Stroke 151, 65.1x53cm, Acrylic on canvas, 2024-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Sangbin IM, One Stroke 151, 65.1x53cm, Acrylic on canvas, 2024-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사회적 관점에서도 그의 ‘일획’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각각의 붓질은 고유하고 독립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화면 안에서 서로를 조화롭게 감싸며 공존한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개별 존재가 갖는 역할과 가치를 은유적으로 풀어낸 것이며, 현대 사회 속 예술이 수행해야 할 윤리적, 철학적 사유의 지점을 상기시킨다.

획 하나하나가 작가에게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이며, 그들이 화면을 구성하고 운율을 이루며, 결국은 우리 시대의 미학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Sangbin IM, One Stroke 304, 72.7x91cm, Acrylic on canvas,  2024-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Sangbin IM, One Stroke 304, 72.7x91cm, Acrylic on canvas,  2024-사진 갤러리 나우 제공

 

결국 임상빈의 회화는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예술 행위다. 완성된 이미지보다, 획이 태어나고, 흐르고, 충돌하고, 소멸하는 그 ‘사이’의 순간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의 ‘일획’은 단지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비추는 거울, 우리 사회의 질서를 되묻는 질문, 형이상학적 사유와 감각이 만나는 경계의 예술이다.

임상빈의 전시 ‘일획’ 는 지금 순식간에 이미지를 만드는 AI 기술과 로봇 기술 시대에서도 예술이 가능한 이유이자, 예술이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를 말해준다.

예술로 그리는 '일획'은 그렇게 시작되며, 결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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