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역사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 '신영진 작가의-낮달-두고온 산하'
이경모 미술평론가
...신영진의 회화는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역사인식이 탄탄한 내공으로 표상된 인문과 예술의 결합체이다. 그는 진지하고 겸손한 접근법으로 자연과 역사를 탐구한다. 그것이 풍경이든 정물이든 인물이든 간에 작가의 시선은 자연에 있으나 그 외형보다는 이면에 내재된 역사를 추적하거나 현상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말한다. 그의 풍경은 땅의 역사를 환기하고 인물은 현실을 응시하며 정물은 다시 자연으로 환원된다. 다양한 제재를 이처럼 완성감있게 다를 줄 아는 화가는 많지 않다. 자연에서 대상을 선별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포착하여 화면에 제시함에도 재현적 완결성은 물론 형태와 질료의 실험과 함께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서사적으로 전달한다...
낮달-두고 온 산하-000
우리는 신영진의 <낮달-두고 온 산하> 연작을 보며 작가의 지적·예술적 고민을 유추한다. 해에 묻힌 낮달은 잘 드러나지 않으나 시간이 지나면 ‘명약관화’ 드러나듯이 진실은 때가 오면 밝혀지게 되어있다. 신영진의 <낮달-두고 온 산하>연작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장소들을 포착하여 땅의 역사성과 가치를 환기하기 위한 시도다. ‘동북공정’이라는 패권적 세계관이 역사를 왜곡하고 영토를 침탈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겠다는 정의감과 패기가 작품에 배어있다.
<낮달-두고온 산하-백두산 망부석>은 백두산을 거시적으로 응시하면서 민족의 기상과 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대륙으로 뻗은 백두산의 산줄기는 고구려의 기상을 시사하고 작가는 망부석이 되어 ‘남과 북이 하나’되어 고토(苦土)를 회복하는 날을 기원한다. 도도하게 산을 비추는 낮달은 ‘시대의 증언자’로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땅인 ‘두고온 산하’를 비춘다. 비스듬히 백두산을 올려다보며 추상적 기조가 가득한 분방한 붓질로 전체와 부분을 포착한 화면은 무채색조가 만연함에도 생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부차적인 디테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그 선들은 하나의 응축된 생명의 형상으로 추상적으로 물질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풍경을 염두에 두면서 형상보다는 이의 의미에 천착하는 역설적 표현방식은 신영진 회화의 형식적 특징이자 풍경에서 기인하지만 추상성을 띠거나 풍경의 심층을 관통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환기한다.
<낮달-두고온 산하-압록강의 잔물결과 운무>는 신영진 풍경화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신영진은 풍경이라는 대상에 자아를 동질화시켜 감성을 표현하고 여기에 형태와 색채의 실험으로 강한 회화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것은 잔물결과 운무에서 비롯되는데, 여행 중 자연과 교감하며 진지하게 대상을 관조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듯 하다. 판에 박힌 재현과 단선적 관점에서 벗어나 물결은 리드미컬하게 양식화되어 있고 운무는 마치 북송대 미불(米芾)의 그것처럼 오묘하고 신비롭다. 여기에 작가는 내재된 추상의 의지를 연결하여 보다 확장된 에너지를 표상한다. 형상의 재현은 물론 빛과 색의 응축, 물질과 형태의 실험으로 요약되는 신영진의 그림은 깊은 생명성을 띠며 스스로 추동한다. 선과 색의 집적으로 시간성을 거슬러 현재와 과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와 이상을 오가듯 형태가 요약되고 물감이 움직이고 선이 유동한다. 그럼으로써 대상이 부각되거나 희미해지기도 하고 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그밖에 신영진은 <낮달-두고온 산하-북녘산하가 보이는 압록강변>, <낮달-두고온 산하-용강리의 아침>, <낮달- 백두산의 보이는 언덕>과 최근 신작 <낮달-두고온 산하- 압록강 잔물결(244cm x 100cm, oil on canvas,2024>연작 등에서 우리 민족의 염원인 ‘두고 온 산하’를 하나하나 기록해 나가며, 전쟁의 비극과 종식을 은유하고 있다. 2025년에 제작되고 있는 ‘낮달-두고 온 산하- 북녘산하가 보이는 압록강- 잃어버린 땅-시리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도식화되고 있다. 그에게서 진실은 풍경 안에 존재하며 ‘낮달’은 진실을 목도해온 증언자가 된다. 작가는 특정한 형식에 의지하지 않고 대상에 맞는 표현기법을 찾아 자신의 그림을 여전히 실험적 선상에 위치시킨다. 조화로운 아름다움과 실험적 표현을 즐기는 그의 그림은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