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 (2)
김종근 미술평론가

낙심한 그는 결국 미술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악을 쓰고 뛰쳐나와 성천강 만세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는 무모하게 죽느니 도쿄에 가서 고학하기로 결심하고, 도쿄의 관립학교에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미술공부를 허락했다.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그러나 그는 끝내 졸업장 없이 조기 졸업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45년이 지난 후 졸업작품으로 내지 못했던 그는 70대의 수염 기른 자화상으로 실제 얼굴보다 좀 젊게 그렸지만,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모자를 쓴 모습으로 자화상을 학교에 제출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6. 25사변 전란에는 종군 화가단에 참가하기도 했고 제2회 국전에 '군동'으로 연속 특선을 차지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서울대 미대에 출강하며 한국 화가로서는 드물게 서양화가 남관과 더불어 처음으로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에 배를 타고 무려 1달이나 걸려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56년에서 61년까지 파리 화단에서 그는 살롱․도 똔느에 출품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신문을 보고 용기를 줄 정도로 그는 화가로서 성공, 최초로 쌀롱 도똔느 정회원이 되었다. 
1961년에 귀국한 그는 국전 심사위원, 초대작가를 역임했고, 그해 제1회 5월 문화예술상 미술 본상을 수상하는 명예도 누렸다. 그러다 196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 초빙교수로 건너가 1980년까지 강의를 했다. 그의 미국에서의 활동은 그에 예술작업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거기서 그는 하모니즘에 대한 착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6.25사변을 겪으면서 형제와 가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총칼을 앞세워 싸워야 하는 충격적인 현실과 체험을 사실주의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유럽에서 추상회화의 유행과 추상화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고 미술사조의 기법과 형식의 변화를 살펴보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그는 그 두 그림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그동안 갈망해 오던 한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그 방법에 대해 착상을 하게 된다.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그날 밤 김흥수 화백의 조형주의 하모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1977년이었다.
정말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서 지나가는 집시 여자가 점을 봐 준 대로 이제 어려운 시기에서 벗어나 탄탄대로를 갈 것이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마침내 작품이 불티나게 팔렸을 때의 감격, 그는 더욱 결사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되겠다고 작심했다. 

그는 회상에 빠져들었다. 대학 정년퇴임을 앞두고 만난 앳된 수(그의 부인 장수현을 그는 수라고 불렀다 )와 과천 서울대공원에 놀러 갔던 일, 한국화가 최초로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푸시킨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기 위해 오가던 일 등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그러나 몇 년 전 미술관을 지으면서 있는 대로 속을 끓이기도 했다. 주민들이 동네 어귀에 미술관이 웬 말이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은행에 대출을 많이 받고 만든 미술관인데 인생이 다 이런 것인가? 고뇌했다. 

그는 그림 재주를 갖고 유일하게 효도를 했던 기억도 잊지 않았다. 동경미술학교 1학년 방학 때 집에 머물다 방이 15개나 되는 집을 여관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위생과 직원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허가를 받아낸 일, 제가 공산당 소속 화가가 되기 싫다고 월남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여복이 많아선지 결혼도 세 번이나 했고, 아들 딸도 많이 낳아 잘살고 있다. 한때 1980년대 덕성여대 교수로 부임하던 즈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는 전처에게 그림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주었다. 1983년 신학기 서양화과 학생들 30명 중 유독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동양적인 얼굴형에 눈빛이 맑은 인상적인 여학생. 그가 바로 수였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뒤에 앉아 있는 그에게 일부러 다가가 가끔 말을 던져보면 감성적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1학기 종강하던 날. 수업 후 종로구 낙원동 낙원아파트의 집으로 학생 모두를 초청했다. 전에도 가끔 학생들 몇몇을 초대하곤 했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자취생활을 하다 보니 그는 제법 요리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림지도도 했다. 

그런데 이날은 종강이라 학생들이 모두 왔는데 김흥수 작가는 학생 하나하나에 서양식으로 포옹을 했고 학생들도 내가 정년을 앞둔 노교수라서 그런지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응해 주었다. 
그러나 수에게서 받은 느낌은 좀 달랐다. 이때 다른 학생들이 거실에 있는 동안 수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작가는 조용히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다시 한번 껴안았다. 그런데 조용히 안겨 오는 수에게서 나는 하나의 확신을 얻었다고 했다.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김흥수 '스승과 제자- 그녀'2-사진 김종근 미술평론가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면서 작가는 그 여학생과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남녀의 본능이었다.
<잉태(孕胎)>(Pregnancy) 1989 이 작품은 우주의 섭리인 음(女)과 양(男)이 조화를 완벽하게 이룰 때 새 생명을 "잉태: 할 수 있다는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연보라색을 주조로 한 오른쪽 화면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남녀의 숭고한 사랑의 모습을 절제된 선과 수직적 색면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신비감마저 감도는 왼쪽 추상 화면은 생명이 잉태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초록색 계통의 색채를 통하여 상징적인 새싹이 자라고 있는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다. 

김흥수 작가가 김종근 미술평론가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김흥수 작가가 김종근 미술평론가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작가는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리 말하지만 그런 특별한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 글을 읽거나 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고 강변했다. 

바로 그가 고뇌한 예술철학, 하모니즘의 개념은 음양의 철학이며 이는 동양사상을 모태로 한 것이었다.

동양사상의 원류는 음양을 하나의 몸체로 갖는 태극에 있다. 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이 태극이 동정(動靜)하여 음양이 생기고 또는 천지 만물이 생성한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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