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 미학산책 표현론 Ⅳ
표현은 목적어 없이 감정표현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가 필요하다. 대체로 아브람스(Abrams)가 표현 이론이라든가 표현주의 이론이라고 논하고 있는 것에는 표현이라고 하는 단어가 채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기묘한 사실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주위에서 이용되고 있는 표현개념을 전제로 역사기술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 주위에 있어서의 표현개념이란 어떤 것인가?
‘예술가란 정서나 감정을 각양각색으로 예술적 미디어에 있어서 분절적으로 표현하는 자’라는 사상을 표현 이론이라고 하고, 그것을 20세기 초두의 사조, 특히 크로체와 콜링우드와 결부시키고 있다.〈Mulhall,‘Expression’, p. 144b〉.
두 사람이 일괄해서 취급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의문이다. 크로체에게는 유명한 직관=표현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직관 혹은 표상은 감각되어 경험되는 사항, 감각의 흐름, 즉 심적 내용으로부터 형식으로 구별된다. 이 형식이나 파착(把捉)작용조차 표현이다. 직관하는 것은 표현하는 것이며 표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Croce, Estetica, p. 16〉 이것은 직관이 그대로 표현된다고 이해할 수 없다. 역으로 크로체가 발상을 이해한 비코(Vico)의 Verum=factum설‘스스로 만든 것만을 진리로서 인식할 수 있다’는 설. 『비코의 철학』 (33쪽 이하, 특히 46쪽 참조)〉에 따라 표현에 도달한 것만이 직관이라고 일컬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미를 성공한 표현과 정의하는 것은 동시에 적절한 것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표현이 성공하지 않을 때에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ibid., p.101〉라는 ‘미학’의 말로부터도 뒷받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크로체에 있어서 단순한 심리적 현실은 심리적 내용에 지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형식을 주는 정신의 능동적 관여가 직관이며 표현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 콜링우드의 표현개념은 속류(俗流)에 훨씬 가깝다. 그는 예술을 일종의 기술이라고 보는 것을 부정하고, 본래의 예술을 표현과 상상의 두 개의 면으로 규정한다. 거기에서 그가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감정의 표현이다.
‘감정이 표현되지 않을 때, (느끼는 인간) 그것을 구원없이 억압된 상태를 느끼고 있지만, 표현되었을 때는 이 억압의 감각이 없어진 상태로 느끼고 있다.’〈『예술의 원리 p.304』. 이같은 표현은 기술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그 감정을 처음으로 의식하는 것이다.(同, p.306-07)〉’
그리고 그것은 감정의 단순한 누설(漏洩)과는 다르며, 의식적·지적인 활동이 된다.〈同, p. 312〉 이 지적인 성격을 인정하는 점에 있어서, 콜링우드의 설은 단순한 통속개념으로부터 구별되지만, 표현을 다만 감정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부합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