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徐蔚)의 탈코드화(decodage) 2.
김문기 미술평론가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가들이 거부하는 개념은 가치창조가 결여된 예술을 위한 예술이며 주체 분열의 프로이드 적 무의식적 추상이나 외부적 물질성에 대한 마르크스적 소외개념의 모델들이다.
제임슨(F.Jameson)은 사회 전체의 구조가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투쟁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사고 된다. 그리고 우리는 문화적 수준에서 사회질서를 적대적 계급 답론 사이의 대화와 갈등 해소와 타협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는 오로지 한쪽 목소리가 기득권을 사용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헤게모니 적 이념들이 모든 적대적인 층의 목소리를 억압할 수 있는 매체적, 법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모든 헤게모니 적 담론은 그것이 사회적 불안이나 갈등을 조성한다는 명분이며 반국가적 이데올로기를 이롭게 한다는 적대적 개념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논리로 탄압하는데 길들여진 불감증 때문에 불투명한 소신을 갖고 있는 지성인들의 책임 회피로 사회적 혼돈을 간과하게 되는 것 같다.
모더니즘 시대를 극복하며 동시대 가치로의 흐름은 주체의 소외란 개인적인 양식이 사회적으로 유용하지 않게 됨으로써 ‘혼성모방’이나 절충 전유 차용을 통한 새로운 실행 방식이 등장 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새로운 실험보다는 과거 시대를 향수 한다는 것이다. 급속한 변화의 낯설음에 개입하기를 거부 하거나 보수적 안일함으로 역사적 흐름에 대한 사고를 거부하거나 시대적 개념의 사고를 거부하는 듯 보이는데, "F.제임슨"은 이 거부를 <소비사회의 분열증>이라는 특징으로 간주한다.
오늘날의 사회 체계는 그 제도의 전통이나 반성적 과거를 보유하는 역량(사유 능력)과 관심을 조금씩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 서울 시민들의 긴장감은 영구한 현재(실속 있는 현실)에 속하기 위해 숨 가쁜 삶의 양식을 꾸려 가야 하기 때문일까? 모든 과거의 양식에 대한 임의적 부품 해체가 성행하는 것 같다.
동시에 우리는 현행 경험들의 표상을 형식화 하는데 무력해 지는 것이 아닐까?
포스트모던 이후 동시대 미술도 F.제임슨의 시각처럼 소비 자본주의의 논리와 속성을 강화 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 기득권의 조직이 대형 마트를 통해 주요 상품을 장악하여 중소 자본을 억압하며 중, 하위층의 소비와 욕구를 유혹한다, <후기 자본주의>의 테제처럼 이제 산업 자본주의는 비물질적 기호의 상품화 쪽으로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생태계 유전자변이 등 종자 보존과 무의식에 대한 침투와 경제 식민지화, 말하자면 한국도 FTA에 의해 전통 소작 농업의 파괴와 미디어 및 광고 산업의 부상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각각 서울의 흐름을 구성하는 주체적 개인이지만 거대한 다국적 탈중심화의 통신망을 그리는 우리의 예술적 감성은 역부족임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엘리트 모더니스트들이 시간과 기억에 많은 흥미를 보인 반면,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문화적 언어는 시간 보다는 공간의 범주에 지배당한다. `F.제임슨`의 해석처럼 소외된 도시인의 은유를 사용하여 시민들이 막연한 상대적 빈곤과 갈등과 불안 속에서 욕망의 카오스를 통해 도시 전체를 마음에 담을 힘과 여유가 없다. 우리가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 계급 현실에 대한 실존적 데이터, 즉 주체의 경험적 좌표를 온전하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총체적 시각과 사고가 필요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지적 <배치의 미학>인 교육적 정치 문화 발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국적이며 세계역사적 의식에서 가치철학의 흐름을 구조적으로 인식해야 하며 한국 중심적 역할과 좌표를 온전하게 정립하고 한국 정신의 문화적 지향성을 가늠하기 위해 새롭게 고양된(지각된) 감각의 비판적 의식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흐름의 지체는 정치적 오류로부터 비롯되며 철학과 인식론의 부재가 아닌가? 권력에 편승된 학자들과 물질에 마취된 고급문화 인력들이 일상적 감각의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와 그 세계의 흐름에 적응하는 감수성과 타협에 의해 물질적 권력을 획득하고자 한다. 문화적 사유의 영역에서 각 생산은 그 자체를 위한 자리를 얻을 뿐 아니라 다른 것들을 대체하고 권력을 갖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컨템포러리 아트가 예술의 진정성을 가늠하며 우리의 미의식(美意識)은~ 서구 모더니즘의 부정적이며 배타적 형식(표현양식)들을 아직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서울의 숨결을 문화적 탈 코드화로 이끌어갈 엘리트 미학자들의 역할이 자각 되길 바란다. `보드리야르'의 세계관처럼 우리의 현실도 진리와 거짓이 전혀 구별되지 않는 기후 속에서 자칫 정치적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면 서울의 코드가 권력층의 진리기준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한다.
"쟈크 데리다"나 "미셸 푸코" 및 후기 구조주의자 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경제적 발전이나 물질문명의 발전 개념이 시대적 진보 개념의 가치와 일치하는 것인지 깊은 철학적 반성이 필요 하다. 우리는 가치창조의 진정성과 철학적 미의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회적 믿음이 있어야 한다.
‘쟈크 데리다’ 나 ‘미셸 푸코’ 나 니체주의자들의 역사적 진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참고 하며 모더니티에 대한 기획은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진리의 표현이 잘못 표현되고 위장된 사회의 역사를 조명하고 복구해야 된다’는 주장에 동의 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해석의 권력을 쟁취하려는 추세이며 주도적인 권력층의 이데올로기가 각 중산층 서민들이 물질적 소비 개념의 경험을 분석하며 이해 하도록 하는 수단을 제한한다.
동시대의 권력형 문화 자본이나(산업은) 개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경험과 각성된 가치관들을 구성하고 조절할 수 있는 매체를 소유할 수 없도록 제한 함으로써 자아 인식의 개념과 세계를 해석할 `언어`나 발언권을 빼앗는다.
우리 엘리트 예술가들의 예술 사회학적 언어의 공적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쟁취 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벅차게 느끼는 경험들을 작품으로 창조해야 하며 더욱 비판적 차원에서 사회적 가치철학의 언어를 예술언어로 창조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더불어 우리의 문화 예술적 공간들은 살아 있는 서울의 창조적 역사가 되도록 해야하며 우리의 예술 작품들이 서울의 영혼을 노래하게 해야 한다. 진정한 우리의 예술혼들이 독백이 아닌 사회적 정화의 언어 권력으로 한국의 미학적 권력으로, 서구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며 새로운 한국 미학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25. 3, .
김문기(아티스트, 시인 ,미술비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