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마이아트뮤지엄에서는 2025년 3월 3일까지 툴루즈-로트렉 '몽마르트의 별'이 전시 중이다.
아르누보-
아르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을 의미하며,1890년부터 1910년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회화, 공예, 건축, 인테리어, 패션 등 조형예술 및 장식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은 물론 미국에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던 양식을 일컫는다.
아르누보 양식은 19세기 산업화에 따른 정신적,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태동하였다. 기계문명에 반발한 예술가와 비평가, 사상가들은 미술공예운동에 수공에 정신에 기반을 두었고, 과거의 양식과 전통을 답습하지 않고 시류에 맞는 현대적인 양식을 정립하려 했다. 그들은 기계와 산업으로부터 눈을 흘리고 자연에 초정을 맞추어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로부터 모티프를 찾았다. 그리고 이를 조형적 특성으로 삼아 양식화하였다.
아르누보 회화의 특성으로는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인 형태와 구조 자연을 모티프로 한 유기적인 선의 과음, 윤곽이 강조된 이미지, 신비감을 자아내는 색재 등이 있다. 아르누보는 국제적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는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체코 출신의 화가이자 장식 미술가이다. 1891년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 카바레 '물랑 루즈' 포스터로 큰 주목을 받은 것처럼, 무하도 1894년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무하는 다양한 시대의 양식적 요소들을 아르누보 장식 미술과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무하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확립했다. 이 양식은 광고 포스터부터 장식 패널, 공예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 분야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1900년대 초반까지 무하는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작품들은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포스터 아트와 상업 미술 분야에서 그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제1부 보헤미안
19세기 말 프랑스는 정치경제, 과학기술, 문화예술의 음성으로 화려한 시기를 맞이했다. 미술계에서는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자포니즘이 유행하고, 새로운 예술 양식을 지향하는 아르누보 운동이 성행하였으며, 산업화와 석판 인쇄술의 발전으로 포스터 미술이 부흥하였다. 이 시기 수많은 예술가들이 파리 몽마르트에 모여들어 그 풍요로운 시대의 신기술과 예술 경향을 자유롭게 실험하였다. 이 근대 미술의 흐름 가운데 귀족의 신분으로 특유의 전위적이며 매혹적인 양식을 개척한 앙리 드 툴루즈-로트랙이 있다.
1880년대 중반 로트렉은 몽마르트에 정착하고 작업실을 마련하였다. 유흥 문화가 성행한 이곳에서 로트렉이 자연스럽게 이끌린 대상은 무용수, 연예인, 카바레 가수 등 몽마르트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당대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집결지었던 카바레 '물랑 루즈'의 홍보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은 로트렉은 대담하고 파격적인 구도와 인물 표현이 특징적인(물랑 루즈: 라 글뤼) (1891)를 선보였다.
일본 판화 우키요에에서 볼 수 있는 비대칭의 대각선 구도, 무용수 '라 굴뤼'의 헤어스타일과 몸짓을 강조한 묘사, 생략과 강조를 통한 전경과 후경의 완급 조절, 그리고 간결한 색채의 대비까지 모든 면에서 파격적인 이 새로운 양식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유명 샹송 가수 아리스티드 브뤼앙의 특징적인 외형과 옷 스타일을 단순하고 감각적인 색채 및 구성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서체를 이미지와 조화롭게 배치하여 현대적인 레이아웃을 선보였다.
본 장은 로트렉의 첫 번째 포스터 작품 (물랑루즈: 라 굴뤼)의 스케치 석판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실험적 기법이 어우러진 초기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 신분을 벗어나 스스로 보헤미안이 되었던 그는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다양한 경향을 흡수하고 응용할 수 있었다. 일본 판화의 구성적 특징, 간결한 선과 평평한 색면, 아르누보 서체가 어우러진 로트렉의 실험정신이 깃든 작품들을 만나보자.
틀루즈 로트렉 몽마르트의 별
마이아트뮤지엄은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 미술의 거장,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의 탄생 160주년을 기념하여 《툴루즈 로트렉: 몽마르트의 별 전시를 2024년 9월 14일부터 2025년 3월 3일까지 개최한다. 로트렉은 프랑스 귀족 가문의 출신 미술가로, '벨 에포크' 시대 파리 밤 문화를 특유의 매혹적이고 도발적인 필체로 표현한 석판화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대 그래픽 포스터의 선구자이자 세계 미술사의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화가, 판화가, 삽화가로 활동한 그는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고 당대 예술의 중심지였던 몽마르트에서 새로운 예술의 다양성을 흡수하며 독창적인 양식을 개척했다.
이번 전시는 로트렉의 심리적 결핍과 비운의 생애를 강조해 온 이전의 경향을 벗어나 그의 예술을 새로운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신체적 장애에도 개의치 않고 사람들과 교류를 즐긴 그의 호방함, 어떠한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새로운 예술을 받아들인 그의 실험정신, 특히 화려함과 저급함 이면의 인간미를 관찰했던 그의 휴머니즘을 강조하고자 한다.
세기말 역동성과 휴머니즘이 맞물려 빚어낸 로트렉 예술의 비범함을 탐구하는 본 전시는 그가 몽마르트에서 탄생시킨 불후의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의 황금기를 이끈 쥘 세레, 조르주 드 피르, 앙리 가브리엘 이벨스, 테오필-알렉상드르 슈타인렌, 알폰스 무하를 포함한 13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망라하여 156점의 석판화 명작을 선보인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유전적 결함과 유년 시절 두 번의 사고로 다리가 위축되는 장애를 가졌던 로트렉은 사냥이나 승마와 같은 역동적인 귀족 문화에 조화될 수 없었고, 대신 그림을 그리며 외로운 시간을 달랬다. 그는 가문의 영향력과 후원으로 당대 저명한 화가인 레옹 보나, 그리고 페르낭 코르몽에게 미술을 배웠다.
1880년대 중반 로트렉은 스승의 울타리와 이젤 페인팅에서 벗어나 몽마르트에 정착하고 작업실을 마련하여 카바레 유명 인사와 파리의 보헤미안들을 자유롭게 그렸다. 그는 첫 번째 석판화 포스터 작품 <물랑 루즈: 라 굴뤼) (1891)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 후 아리스티드 브뤼앙, 제인 아브릴, 이베트 길베르, 로이 풀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스타들의 개성을 간결하게 표현한 독창적인 화풍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유명 인사뿐만 아니라 매춘부의 평범한 일상에 애착을 가지며 인간에 대한 비범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로트렉은 동시대 다양한 층위의 문화와 예술에 직접 뛰어들어 세기말 회화의 다양성을 흡수하고 몽마르트의 쾌락과 자극을 받아들이며 즐겼다. 그러나 1891년부터 1901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31점의 포스터를 제작하며 창작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중독과 잦은 매춘으로 1897년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1901년 9월 9일 지롱드에서 자신의 영원한 지지자인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36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737점의 유화, 275점의 수채화, 369점의 판화 및 포스터, 그리고 4,784점의 드로잉을 남긴 그의 예술과 정신은 어머니의 뜻과 함께 세워진 알비 미술관을 주축으로 보전되고 있다. 로트렉은 현대 판화의 태동 속에서 석판화 광고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전위적인 구성과 실험적인 필치로 현대 회화의 도래를 촉진하는 데 기여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예술은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카페 콩세르
LE CAFE CONCERT
판화집 (카페 콩세르>는 프랑스의 화가 앙리 가브리엘 이벨스와 로트렉의 작품을 한데 엮어놓은 판화 작품집이다. 당대 프랑스 예술가들의 판화집을 발간했던 정기 간행물 레스탕페 오리지날이 출간하였으며, 작품집 안에는 두 예술가의 판화 11점씩 총 22점의 작품이 담겨 있다. 그들은 당시 유명했던 카바레 스타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리며 세기말 파리의 화려한 밤 분위기를 기록했다. <표지, 카페 콩세르)에는 이벨스가 그린 석판화가 사용되었다.
앙리 가브리엘 이벨스는 책과 악보의 표지 삽화, 광고 포스터 작업에 주력한 석판화가로, 1890년대 프랑스의 저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파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던 로트렉과 이벨스는 1891년 파리의 르 바크 드 부테빌에서 열린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화가들》에 함께 참여하면서 친분을 이어갔다. 두 사람 모두 '레스탕페 오리지날'에 작품을 실었으며, 당시 파리의 문화 예술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1893년에는 판화집 <카페 콩세르>를 공동 제작하여 출간하였다.
제2부 휴머니스트
파리에서 새로운 반향을 일으킨 로트렉은 살롱 데 상 갤러리와의 인연으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로트렉의 작품을 전시한 살롱 데 상 갤러리는 1895년에 국제포스터 전시의 광고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예술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로트렉은 대중이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고가의 석판화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1896년 살롱 데상 갤러리에서 선보인 (엘르>는 로트렉의 판화집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사창가에서 지내며 매춘부의 소박한 일상을 특유의 관찰력과 인간애로 담아낸 12점의 연작은 인간에 대한 로트렉의 예리한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많은 예술가들이 매춘부와 같은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그렸지만, 같은 대상을 표현할지라도 로트렉의 시선은 인물의 특징과 그들의 숨겨진 애환에 향해 있었다. 로트렉의 인간 중심 회화는 창작 생애 전반에 걸쳐 두드러진다. 빈센트 반 고흐나 에드가 드가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풍경화보다는 인물을 그렸다. 첫 번째 포스터 <물랑 루즈: 라 굴뤼)에서도 라 굴뤼의 매력이 강조되는 구성에 주력하며 인물 중심의 표현을 선보였고, 일본 판화에 영감을 받은 '크로핑' 기법도 인물의 개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차용하였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접근은 <엘르>에서 절정으로 드러난다. 에로틱한 장면 속 매춘부가 아닌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영위하는 한 여인으로서 그들을 묘사한 로트렉은 신분과 계급의 굴레를 벗어난 온전한 인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로트랙은 1895년까지 지속적으로 여성 배우나 가수를 묘사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는 유명 가수 메이 벨포르와 무용수 메이 밀턴의 포스터를 제작했는데, 그들의 통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의 매력과 재능을 강조할 수 있는 필체와 컬러를 선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본 장에서는 로트렉의 기법이 한층 더 원숙하게 표현된 작품들과 함께 그의 휴머니즘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보자.
엘르
프랑스어로 '여인들'을 의미하는 <엘르>는 로트렉이 1892년에서 1895년 사이에 종종 파리의 사창가에서 지내며 매춘부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린 판화집이다. 19세기 후반 에두아르 마네가 직업여성을 작품에 담은 이후, 이러한 노골적인 이미지들이 에드가 드가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가들로부터 삽화나 판화로 제작되어 왔고, 미술시장과 부르주아 남성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다.
<엘르>는 미술상이자 에로틱한 판화 작품들을 주로 출판했던 귀스타브 펠레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동일한 이미지가 채색 및 흑백으로 인쇄된 표지와 표제 삽화를 포함하여 총 12점의 판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목판화로 제작된 일본의 춘화집의 구성과 유사하다. 하지만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하였던 일본 춘화집과 달리, 로트렉은 자신이 직접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경험했던 매춘부 여성의 일상생활을 친밀하게 묘사하였다.
제3부 몽마르트의 별
로트렉에게 몽마르트는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매춘과 음주에 취약하게 만든 곳이기도 하였다. 1897년부터 로트렉은 알코올 중독과 잦은 매춘으로 병원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1901년에는 다리가 마비되기 시작했고, 손에는 경련이 일어나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시기 그는 1872년에 아버지와 함께 관람했던 서커스를 회상하면서 그 장연들을 색연필로 담아내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로트렉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포스터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고, 파리와 보르도의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면서 예술과 삶에 대한 불꽃이 소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트렉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영원한 지지자였던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1901년 9월 9일 지롱드에서 36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화려하지만 짧았던 19세기 말의 덧없는 시간과 닮아 있는 로트렉의 예술과 생은 오늘날 귀한 유산으로 전해진다. 로트렉은 근대 판화의 태동 속에서 석판화 광고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혁신적인 서체 배치로 현대 그래픽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며, 전위적인 구성과 실험적인 필치로 현대 회화의 도래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화려한 몽마르트의 별들이 지닌 슬픔과 유머를 세상에 직접 뛰어들며 표현하였던 그는 이제 근현대 미술사의 별이 되어 오늘날을 조용히 비춘다. 특정한 이념과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철학으로 인간사의 뒤안길을 관찰한 로트렉은 그 어떠한 지적 피력 없이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순간을 그리는 데 전념했다. 본 장에서는 로트렉의 원대한 실험정신과 인본주의적 통찰력이 빚어낸 그의 창작 생애 후반기 판화 작품과 다양한 삽화 작품들을 만나보자.
석판술의 발전-
석판화는 평평한 석판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후, 물과 기름의 불혼화성을 이용하여 찍어내는 평판 기법의 그림이다. 석판 위에 리소 판술과 같은 유성의 크레용으로 도안을 그린 다음, 아라비아 고무역과 약산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석판 표면에 발라 코팅한다. 그런 다음 석판에 물을 적셔준다. 이때 밑그림을 제외한 부분에만 물이 스며드는데, 이는 아라비아 고무역액이 친수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유성잉크를 바르면, 물이 들지 않은 유성의 필그림 위에만 잉크가 풀게 된다. 이 석판 위에 종이를 얹고 프레스기를 통해 찍어내면 이미지가 나타난다.
석관 인쇄술은 독일의 극작가 요한 알로이스 내밀더가 석판 안녕을 유성잉크를 개발한 후, 1798년에 발명한 인쇄법이다. 그의 석판 인쇄술은 프랑스계 독일인 만화가 고드프루아 쌍겔만에 의해 프랑스로 전파되었고, 병겔만은 '다색 석판술'의 개발로 특허를 받은 다음, 이를 상업화하였다. 저렴하고 신속한 제작이 가능했던 식판 인쇄술은 19세기 중반부터 정차 신문, 포스터, 도판, 라벨, 편지지 삽화 등 상업 예술 분이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시각예술 분야에 혁명을 가지했다.
1880-1890년대에는 특히 석판화가들이 판화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석판화 작업에 매진했던 예술가들로는 로트랙을 비롯하여 멀리 가브리엘이벨스를 고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를 시낙 등이 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를 의미하는 벨에포크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회, 경제, 과학 기술, 문화가 크게 번성하였던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40여 년간 프랑스에서는 제3공화국의 수립과 제2자 산업혁명이 맞물려 근대화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파리 개즈 사업 이래로 구축된 철도 교통 시스템은 인구의 이동과 상품의 유통을 용이하게 하였고, 파리 인구 증가와 도시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산업 및 경제 발전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유름과 오락 문화가 유행하여 카페 공세트, 카바레, 댄스홀 뮤직홀 동이 생겨났고, 예술가들은 이곳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벨에포크는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아르누보와 상업 예술 등 다양한 예술 운동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이 프랑스에 모였고, 파리의 삶통 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예술 교류의 장(場)이 되었다. 선진국 대열에 오른 프랑스는 1851년 런던한국 박람회를 뒤이어 두 번째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높였다.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
로트랙과 같은 시대를 풍미하며 프랑스 아르누보 포스터의 황금기를 이끈 예술가들이 있다. 파리에 화려한 색채의 대형 포스터를 가장 먼저 선보였던 쥘 세레는 로트렉보다 앞서 1889년에 물랑 루즈의 개업 포스터를 그렸다.
그는 현란한 색채와 아르누보 양식의 선묘로 묘사된 익명의 여성 이미지로 물랑 루즈의 흥겨움을 표현했는데, 이는 라 굴뤼를 주인공으로 한 로트렉의 인물 표현 방식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짧은 주기로 교체되는 거리 포스터를 '덧없는 순간의 예술'이라 간주할 수 있을 만큼 포스터 매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세레는 로트렉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포스터 미술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프랑스는 16세기로의 전환기에 서체 위주의 포스터를 도입하였으나. 이미지와 서체가 어우러진 포스터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되었다. 석판화는 1815년에 프랑스에 도입되었으며, 1830 년대에 도서 광고 포스터가 흑백의 석판화로 종종 제작되었다. 세레는 1866년에 개인 작업실에 최신 석판화 인쇄기를 들여 다양한 실험을 통해 예술적인 포스터를 창작하였다.
그는 총 세 개의 석판만을 사용하여 빨강, 검정, 그리고 주황색에서 파란색으로의 그라데이션 색감을 적용하였는데, 이는 보다 신속하고 저렴하게 채색 포스터를 제작할 수 있는 혁신을 가져왔다. 체코 출신의 화가인 알폰스 무하는 파리에서 제작한 첫 포스터로 큰 주목을 받았고, 특유의 장식성이 풍부한 '무하 스타일'로 명성을 떨쳤다. 스위스 출신의 테오필-알렉상드르 슈타인렌은 로트렉과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아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며 프랑스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벨에포크 시대에 융성한 산업 분야는 더 많은 예술가들이 광고 포스터를 비롯한 상업 미술에 도전할 수 있게 했다. 대중의 시선을 끌고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필요성이 있는 포스터의 특징 때문에 예술가들은 종래의 정형화된 양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험적인 기법을 적용하고 다채로운 스타일을 선보일 수 있었다. 평면성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짧은 수명을 바탕으로 변형을 거듭하는 포스터 미술의 특징은 현대 미술의 진화를 촉진시켰다.
마지막 장은 19세기 말 파리 시각 예술 문화의 중심에 있던 포스터 미술의 발전 역사와 다양한 조형미를 다룬다. 로트랙에 비해 당대 프랑스 포스터 예술가들은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본 장에서는 모티프와 매체, 그리고 근대적 화풍 면에서 로트렉의 예술과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고유의 미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