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란 경험과 공로가 있고 덕망이 높아야
인천예술의 정신적 지주
원로란 경험과 공로가 있고 덕망이 높아야
박명인(미술평론가·한국미학연구소 대표)
인천원로작가회가 창립된지 올해로 7년째 된다. 몇 분이 글을 써왔지만 그 중에 유독 인천미술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내용이 있었다. 인천미술의 태동기부터 유명을 달리한 인천출신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적나라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이 내용을 재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좀 더 다른 방향에서 원로화가들을 조명해보려고 한다.
원로라고 하면 나이만 많으면 조건없이 원로라고 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내밀한 의미를 가름하면 물론 나이도 중요하지만 나이는 큰 의미가 없다. 이를테면, 오랜 경험과 공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이를 거론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경험이 부족하고 공로도 없고 덕망조차 없다면 원로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원로란 자고로 문사철(文史哲) 즉, 학문은 물론 역사성이 있어야 하고 또한 철학성이 있어야 덕망이 높아 후대에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후세대에게 아무 것도 물려 줄 것이 없기 때문에 원로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원로개념은 로마시대에도 있었고, 선진국일수록 원로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언젠가 야구선수 이승엽이 일본 요미우리 선수로 있을 때 감독이 게임 중에 더그아웃(dugout)으로 가서 백발노인과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원로에 대한 예우이고 원로의 역할이다. 감독은 이 노인에게 자문을 구하고 다시 게임을 진행한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원로에 대한 개념이 없다. 지난 8월에 차이나타운에 있는 어떤 갤러리에서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에 갔는데 젊은 여자 하나가 유난히 떠들어대더니 노인들은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망발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80 이상의 연령층 인천원로화가들이 있었다. 필자도 80나이에 이 자리에 있었는데 참으로 참담함을 느꼈다.
인천의 원로는 노령이 되도록 인천미술을 위해 과거의 어려운 환경과 역경을 거치면서도 많은 체험을 해 왔기 때문에 인천의 산 증인이다. 산 역사이다. 그런데 상대를 하면 안 된다? 참으로 목격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근자에 인천원로작가회에 축사를 한 적도 있고 원로화가들과 많은 자리를 하면서 인천의 미술역사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대한민국은 일본 강점기를 거치고 6·25사변, 4·19, 5·16, 12·12 등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버티고 견디어 내면서 역사를 체험하고 도를 닦듯이 수양하면서 견딘 사람들이 오늘날 후진들에게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50년대 이후 70년까지는 쌀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던 어려운 환경을 딛고 살아온 원로화가들이다. 이형회를 창립한 장두건 선생을 비롯하여 수 많은 화가들은 미술을 하려면 굶주림을 벗어날 수 없다며 부모로부터 반대에 부닥쳐 법대나, 상대로 진학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장벽을 딛고 오늘에 선 원로들이다. 누가 감히 폄훼할 수 있는가.
인천에는 미술계의 거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열악한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자신들만의 영달을 축성하였다. 필자는 언론생활로 인해 이 중에서 박영성 선생이나 남계 이규선 선생, 평론의 김인환 선생 등 몇몇 사람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이당 김은호 선생은 평소 창을 좋아했는데 현재도 육성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인천출신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울에서 살며 활동하면서 인천을 내세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인천에서 태어났을 뿐, 인천의 화가들이 아니다. 인천을 빛낸 업적이 무엇이던가. 자신이 태어난 인천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자신의 고향 인천을 자랑스럽게 여겼는가. 타지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인천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그래도 인천출신이라고 거론할 수 있는가.
인천원로라면 바로 자신이 태어난 곳을 지키고 발전을 위해 몸 담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업적이 빛나고, 인천발전에 기여하여 타에 모범이 되는 덕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간 인천의 원로화가들과 많은 교우(交友)를 쌓고 대화할 기회가 많았지만 현재의 원로화가들이야 말로 인천을 지켜 냈고, 당당하게 인천의 화가를 자처했으며, 인천예술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혁혁한 분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천의 미술도 무척 열악했었다. 초대 원로회장이었던 노희정 선생은 수도 없이 인천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서는 인천시립미술관이 세워져야 한다며 간곡하게 염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서 인천의 발전역사를 연대별로 한 눈에 볼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실현성을 암울하다.
실상 대한민국의 미술역사는 서양미술의 도입을 계기로 현대화되어 왔지만 그 역사는 불과 120년에 불과하다. 조선조 말에 가난을 모르고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국난을 피해 일본으로 떠났고, 현대미술도 일본으로 유학한 1세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유학생들은 일본인들의 핍박으로 일본전람회에 참여를 거부당하자 조선미술전람회를 창립하면서 자립의 길을 열었다. 이것이 한국서양미술의 태동이다. 그리고 1945년 해방되면서 조선미술전람회는 한반도의 뿌리가 되었다. 이들에 의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국전이란 명분으로 공모전을 시작하면서 후진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 때 이미 인천에서도 내동 금융조합 2층에서 해방기념미술전람회 인천전이 열렸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시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때였던가.
서울에서도 1970년 대에만 해도 전람회 장소가 없어서 소공동에 있던 시공관에서 전람회를 하거나 큰 전람회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6·25사변이발발하여 시련을 겪게 되었고 서울 수복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인천을 떠나서 서울에 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인천이 싫어서라고 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천출신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않은 것은 좋게 볼 수 없다.
요즘은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다. 시대가 변천하고 대한민국은 제주까지 1일 생활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인천미술전람회에 참석하면 멀리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많은 미술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많은 원로화가와 식사를 나누며 대화의 시간도 많았다. 여기에서 진정한 원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천을 사랑하는 애향심을 피부도 느꼈다. 과연 인천의 원로화가로서 과거의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해왔는가 하는 고충을 알게 되었고, 인천의 수 많은 화가들의 활동과 문화거리 조성 또한 굳은 의지가 바로 인천의 원로화가들의 공로가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인천을 떠나 공명심에 젖어 살다 간 사람들은 구태여 논공을 따질 필요도 없다. 오늘날까지 인천을 지키고 버팀목이 되어 온 인천원로작가회야 말로 진정한 인천의 예술인들이다.
2017년 초대 회장 노희정 선생을 비롯하여 현재 윤석 회장에 이르기까지 불과 7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도 원로화가들은 비록 인천을 떠나 활동했어도 인천을 빛낸 선배화가라며 떠올린다. 인천을 떠난 화가들, 외지에서 활동한 화가들도 모두 인천출신이라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긍정적인 인천원로화가들의 성품은 젊은 예술인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고 있다. 개중에는 원로화가들을 폄훼한 자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원로화가들의 생각은 빛나는 아우라가 되어 인천의 미래를 밝게 비치게 될 것이다. 바로 원로의 덕망인 것이다. 향후 인천의 문화예술발전은 이들 원로작가들에 의해 더욱 번창하고 후세대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