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는 2025년 2월 23일까지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이 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시 《일어서는 삶》은 김인순이 천착했던 ‘여성’이란 주제의 예술적 실천을 들여다본다. 작가의 여성주의 태도는 여성 존재의 애환에서 시작한다. 그는 여성의 건강한 의지와 생명 에너지가 인류의 평등하고 밝은 미래를 이끈다고 믿었다. 전시는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총 20점의 작품과 아카이브가 출품된다.
작가 김인순(金仁順, 1941– )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가이다. 사회를 반영하는 리얼리즘 미학과 현실주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 작가는 한국 여성의 사회적 현실을 예술로 표현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실천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여성의 시대적 가치를 탐색했다. 더욱이 여성이 가진 긍정의 힘과 생명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한국의 자생적 여성미술을 민족적 조형언어로 구축하고자 했다. 2020년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 연구와 미술사적 기록 보존을 위해 양평 작업실에 있는 작품 106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기증 작품은 작가 본인의 작품 96점과 1980 – 90년대 여성미술 운동을 실천한 여성미술연구회(여성미술분과, 1986 – 95), 그림패 둥지(1987– 89), 노동미술위원회(1990 – ) 등이 공동 제작한 걸개그림 10점으로 구성된다.
김인순 컬렉션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성 작가들은 1980년대 한국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여성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김인순 작가는 최초의 페미니즘 전시로 기록되는 제2회 《시월모임 – 반에서 하나로》(1986)를 기획했다. 여성미술연구회와 그림패 둥지를 조직하고 한국여성단체연합과 교류하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현실을 작품으로 그렸다. 나아가 여성의 고유한 경험 가치를 고민했다. ‘모성’을 중요하게 여긴 작가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여성의 존재를 ‘뿌리’에 비유한다. 시대 상황을 예술로 반영하고자 한 민족미술협의회(1985)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인순은 민족주의 여성미술가이기도 하다. 여성민중의 계급 현실을 비롯한 노동과 육아에 관심을 뒀고, 노동미술위원회를 구성해 노동자의 삶을 공감하는 회화를 제작했다. 또한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 ‘통일’ ‘산하(山河)’ 등의 주제를 그렸다. 김인순 컬렉션에는 여성미술연구회 연례전 《여성과 현실》(1987 – 94)의 출품작이 포함되어 한국 여성사를 아우르는 한국 여성미술의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김인순 작가의 '여와 남'에서는 남성의 권위주의를 고발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단초를 마련했다. <여와 남>은 나체의 여성과 남성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다소 크고 어깨도 더 넓게 묘사되어 있다. 경직된 자세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남성과 그를 뻣뻣한 자세로 곁눈질하며 노려보는 여성 사이에 긴장감이 느껴진다. 김인순은 “근본적으로 여자를 앞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남성이 우선시되는 현실을 반전시켜 여성이 앞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남성과 여성 간 위계질서에 도전하고 주체적인 여성을 재현하고자 했다.
김인순의 '일어서는 여자'는 한 명의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세상에 꿋꿋이 맞선 작가의 현실 인식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커다란 나무조차 쓰러뜨릴 것 같은 강풍에도 불구하고 곡괭이를 든 채 맨발로 언덕에 서 있는 위태로운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언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굴뚝이 있는 공장은 이 여성의 삶의 터전을 암시한다. 휘몰아치는 역경에 당당히 맞서며 묵묵히 자신의 삶을 일구는 여성에게서 생의 의지와 강인함이 느껴진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과감한 구도와 작은 소재들을 구성하여 하나의 전체 이야기를 조직해 나가는 서사 방식이 돋보인다. 이후 김인순의 작품에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가정과 노동’ ‘여성의 건강한 아름다움’ ‘나무와 땅 ‘생명과 생산’ 등의 개념을 살펴볼 수 있는 초기작이다.
김인순의 '엄마의 대지'는 울산 공업단지를 배경으로 힘겹게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공업단지와 그 아래로 연결된 지하 배관은 산업화로 훼손된 대지 모습을 드러낸다. 검붉게 묘사된 땅 밑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힘겹게 버티는 여성의 모습은 ‘엄마 노동자’의 강인한 모성애와 고된 삶의 현실을 동시에 환기하며, 강인한 눈빛은 여성의 힘과 의지를 드러낸다. 지하 배관에서 흘러나와 여성 앞쪽까지 이어진 노란 불꽃은 척박한 땅에서 산업화의 불꽃을 키워낸 여성노동자들의 생명력을 은유한다. 불꽃 끝에서 피어난 푸른 새싹은 대지의 생명력과 여성이 탄생시킨 생명으로 변화할 미래 희망의 상징을 나타낸다. 김인순은 이 작품을 <뿌리>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생명을 키워내는 여성의 능력과 모든 생명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순리를 연결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새싹을 피워내는 대지의 자정 능력과 고된 삶 속에서도 아이를 길러내는 모성이 갖는 힘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