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봉 심혼시 '이카루스의 비원'
김 규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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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나는 네가
그냥 스쳐지나가기를
바란다.
가슴을 도려내는
잔인한 칼날이여
나는 네가
분명하지 못한 세월의
무료와 기만과 광란과
아, 또 다시 만드는
가면극의 대본처럼
녹슬고 무디어져
예민한 신경마저도
둔탁한 몸부림으로
너를 인내하기를
바란다.
지금 나는
사랑과 자비를
기다리는 얼굴로
너를 아파할
호사함이 없다.
지금 나는
바람 이는 바다 위에서
사람이 부르는 신의 노래로
보람을 찾고자 하는 때
지금 마악 시작한
그럴싸한 인생의
장엄한 결말을 위하여
너를 기꺼이
반길 수 없다.
아니 솔직히
이카루스의 비행을
마치기 위해서
아직은 공중에 떠있는
확실한 추락의 운명이
잠시 너를
잊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거듭
슬픔이여
나는 네가
그냥 스쳐지나가기를
바란다.
너의 광활한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핏발선 눈으로
생동감 있는 언어를 선택할 때
그 때 너는
있어도 된다.
그 때 너는 정녕
정액냄새 물씬 나는
너의 일기장을 태우면서
화석처럼 굳어진 입술로
잊혀진 애무의 환영을
꿈꾸어도 된다.
슬픔이여
사실 말하자면
나는 이렇다.
내가 너를 가까이 한 것은
사실 이렇다.
어느날 강렬한 태양 아래
깊게 노출된 나의 가슴이
심장의 분수대를 향하여
뛰어 갈 때
천둥과 번개를 달고 나타나
나를 내놓으라 하는
너의 주인, 비구름의
질투와 광기
그리고 어둠과 빛도 아닌
낮과 밤의 중간에서
서성이면서
적당히 마비시켜야 할
정신의 정수리에
술이 아닌 비를 뿌리고
살아있는 육신과
또 다른 육신의 결속을
주선하며
신념도 정념도 아닌
무념의 밧줄을 길게 내려
꽁꽁 묶었던 것이지
야비하지도 거창하지도
더 더욱 비속하지도 않은
숨결로 오직
눈을 감고 느껴야 할
절정의 광막한 어둠을
고결한 입술로 누웠던 것이지
슬픔이여
나는 네가
그냥 내 곁을
스쳐지나가기를 바란다.
너의 광활한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핏발선 눈으로
생동감 있는 언어를
선택할 때
그때 너는
내게 와도 된다.
슬픔아
그래 나는
네가 그냥
스쳐지나가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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