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사실론 Ⅶ
어쨌든 제작은 내면의 심미의식에 의해 미를 탐구하는 것이지만, 그 유심적 영역에 있어서는 그러한 느낌이 강하다. 그 수법은 노골적으로 힘들게 찾아내는 느낌이 짙다. 마음으로 진지하게 대상을 느낌으로 보면서 스스로 필적을 감시한다. 자력(自力)의 한계를 그것이 추구되어 수법은 생각을 되돌리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유형적 요소는 필연적으로 무형을 대신하기 어려운 유일한 요소가 된다. 무형과 유형은 여기에 있어서 혼연과 일치 융합하여 상생(相生) 한다.
그러나 그 수법의 방법은 역시 유심적인 느낌이 담겨 있다. 장식에 있어서는 한층 힘들지만 사실에 있어서도, 최심(最深)의 영역에 있어서도 역시 손은 ‘마음’으로 체득해서 움직여진다. 깊이 숨을 죽이고 가장 숙고했을 때 모든 정신력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움직여지지만, 마음의 영역이 알지 못하는 물체를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을 담아 낸 선과, 마음을 담지 않고 그려진 선은 다르다. 적어도 선과 선의 교제에 의해 일으키는 느낌의 차이에서는 그것을 아무도 거절할 수 없다.
조용하게 그려진 선은 역시 조용한 느낌을 주고, 빨리 그려진 선은 역시 속도감을 준다. 조용한 마음으로 색칠된 것은 조용한 느낌을 주고, 번화한 마음가짐으로 색채는 번화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주관이 선이나 색을 독자적으로 선택했다고 하기 보다는 더욱 직접적으로 선이나 색을 주관적으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깊은 마음가짐 역시 표현기법에도 깊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즉발적으로 형이 된다는 느낌은 바로 이것이다.
사실에 있어서도 가장 깊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영역을 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같은 영역을 주로 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적 요소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 아니며, 만약 사실적인 미를 살리기 위해 유심적인 영역을 죽이게 되는 경우에는 유심적인 영역을 살리기 위해 사실적인 추구는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사실의 가장 사실적인 영역을 희생으로 하기 때문에 이미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유심적인 영역만 이라면, 그것은 사실에서도 장식에서도 없는 하나의 ‘미(아이디어)’이기 때문에, 만약 이 정신만 강조되고 있어서 사실적인 의의를 멀리한다면 이미 사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상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정신을 나타내는 방법이 사실적인 의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물체미의 묘사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물체미의 묘사는 부족할지라도 정신이 실재를 차지하는 이상 그 정신도 하나의 실재다. 객관적으로 육안을 통해 보여지는 물체이다. 그것을 그리는 것이라면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이나 물질 미만이 실재가 아니다.
단지 그 정신이 실재로부터 벗어나고, 주관적인 것이 되어버리면 거기에는 이미 사실의 계통은 없어진다. 그것은 상상 또는 장식에 의해서가 아니면 나타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신이 실재일 때는 역시 그 표현은 사실계통을 밟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에 얽매여도 안 된다. 묘사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 좋다. 물상에 입각한 미의 사실보다는 정신의 미가 있는 물상에 입각한 미가 있다는 것이며 정신의 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이 두 가지 미를 잘 살린 혼연한 깊은 맛은 또 다르다. 모나리자나 반·에이크의 작품에 이러한 깊이와 영구(永久)한 맛이 있다.
작가에 있어서 정신을 미화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힘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정신을 지켜내는 모든 물상의 여러 가지 미를 그리는 것은 또한 행복한 기쁨이다. 그렇게 해서 그러한 미를 언급하는 것은 작가의 힘을 다 쏟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에는 불가사의한 열정과 힘이 담겨진다. 움직이지 않는 엄연한 힘이다. 무엇이라고 해도 사실은 건전한 맛을 가진다. 겉보기가 보통인 것 만큼, 여전히 전부적으로 마음을 살릴 수 있는 느낌이 든다. 집착이 강한 강직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