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사실론Ⅴ
이 질의 미감은 물질 또는 현상 바로 그것의 미화이며, 주로 촉감의 조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촉감이라는 의미는 손에 닿는다는 의미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 대상과 사람과의 여러 가지 유형무형의 교섭이라는 의미를 포함시키면 한층 확실히 명확해진다. 물론 이 촉감의 조형적인 표현이 질의 미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물질표상의 색이나 울퉁불퉁한 요철이나 오염된 그러한 것들도 독특한 시각상의 자극이 되면서 촉감의 미감이 혼연(渾然)이나 결점이 없는 모양과 용합하고 있다. 그 자체라는 느낌을 주는 것에 있어서 표상의 시각적 특질과 촉감과 일치한다. 그래서 마른 흙이 폴폴 날린다든지, 풀이나 수목은 흙에서 난다든지, 밥그릇은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든지 이런 것들은 촉각을 떠나 차갑게 표현되는 것이다. 이 질의 느낌은 촉감의 느낌이 시각에 주는 생생한 느낌으로써 대체로 신비로운 느낌이나 마음에 장중한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이 질의 미감을 표현할 때, 화가는 일종의 사랑을 마음에 일으킨다. 그것은 그려지는 물질에 대한 사랑이며 화가는 시각을 추구하는 것에 의해 이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촉감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느낌이지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일어나는 애정은 무형의 영역에 가해지고 있을 수 있었던 하나의 심미의식이다. 이 무형이 사실에 있어서 최고의 무형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무형의 영역을 취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손에 접촉한 밥그릇ㆍ발에 밟히는 흙ㆍ부드러운 뺨ㆍ뭔가 말하는 입술, 이것들의 현실은 그대로 예술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에 접했을 때 마음가짐을 우선시 해야 한다. 그것은 실물이 가지는 신비한 수수께끼의 재현이다. 이것은 사실만으로 용인된 가장 사실적인 영역이다. 물체의 여실감의 추구가 곧 예술적 미화가 되는 것은 이 질의 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의 심저(深底)에는 질의 미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질의 미를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무형의 미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만이라도 물론 진실한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에는 또 하나의 깊은 무형의 영역이 있다. 사실로 해라, 상상으로 해라 하는 의식에서 가장 깊은 것에 도달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실의 길을 가는 것에 의해 사실에 이른다.
이 영역은 사실에 있어서의 사실 이상의 영역이다. 또한 장식에 있어서 장식 이상의 심오한 영역으로써 미술로서의 방식을 초월한 존재이다. 미술로서 가장 심오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 영역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영역에 있어서는 미라는 관념이 더욱 무형적인 느낌을 짙게 한다. 보통 미감이라는 느낌보다 진(眞)이라는 느낌에 가깝고 완전히 형을 초월하는 유심적인 영역이다.
질의 미도 물론 형을 초월하는 것이다. 단지 마음에 비칠 때나 표현될 때도 형에 머무는 것이다. 필경 미는 형에 머무는 형이상(形而上)의 형이다. 그러므로 질의 미는 질이 주는 미적 정신적 감동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오한 무형이다. 그러나 심오한 미술의 미적 감동은 그 느낌이 형태에서 즉시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에 있어서 미술품에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일체의 미술적 요소이며, 따라서 일체의 형이다. 그리고 작품의 감명에 있어서는 일체의 형을 제외하고는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이 화가에게 느껴지거나 또는 미술을 통해서 관자에게 느껴질 경우에는 그 영역은 형을 넘어서 갑작스럽게 사람에게 타격을 준다. 즉, 물질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담긴 정신, 또는 그림에 깃든 정신이라고 말해도 좋다. 일체의 형, 또는 형에 입각한 미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사실에서는 그것들이 혼연(渾然)과 그 느낌을 받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