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사실론' Ⅱ
정말로 사실의 길은 이른바 ‘베낀 미’의 길이다. 어떤 사람은 타인이 그려준 것을 대작이라며 마치 자신의 작품인양 내세우기도 했지만, 적어도 ‘내면의 미’를 표현하는 데는 어떠한 대신도 없다. 정신까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물의 형상에서 미를 보고 자연의 형을 추구하고 미를 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미술은 그 화가가 표현한 나름대로의 미이기 때문에 베껴진 모든 그림도 사실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자연파류의 화가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작상의 경험으로 본다면, 마음에 의해 행해지는 미화(美化)의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형ㆍ색ㆍ붓 등에는 그것을 증거로 세울 수 없다.
형에도, 색에도, 붓에도 내면으로부터의 장식은 없으며 단지 수공의 잔해만 있다. 장식이 없는 사실은 그대로 그린다는 것에 멈춘다. 결코 진짜는 그리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아름다움의 정도, 혹은 개념적인 정도에 멈춘다. 형에 머무는 형이상의 영역, 그것이 형에 머물고 있는 느낌, 이것을 형에서 찾아내는 것이 미를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장식이 있다. 이것이 내면의 미화이다. 그 표현이 바로 사실이다. 여기에 있어서 사실이라고 하는 단어는 산다. ‘실’은 진실의 의미가 되고, 미술에 있어서는 미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것이 본래 예술적 영역에서 빠져 비예술적인 단순히 기술로 가기 쉽고, 또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석되는 것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원래 사실의 길은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방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질을 여실히 재현해 보려고 하는 것, 그러한 본능이나 또는 실용상의 필요(예를 들면, 상형문자)로부터 그 본능이 응용되었을 때부터 일종의 사형(寫形)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술에서도 예술에서도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내면의 미와 일치해서 표현되었을 때에 처음으로 예술다워진다. 태고(太古)는 내용도 단순하지만 미술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실의 길은 발달하기 어렵고, 따라서 무의식적인 길이 발달하고, 사실은 단지 장식을 나타내는 재료로서 부수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것이 질료가 단순하게 끝나는 조각이 태고에 있어서도 생생한 사실적인 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회화가 단순한 장식적인 하나의 이유이다.
그러나 내면의 미 또는 장식이라는 것은, 표출되면서 인간의 내부에서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형이나 색을 보면서 유발되어 오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형을 보고 그 중에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내면의 미에 눈을 뜨는 것이다.
자연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면의 미에 눈을 뜬 증거로써 미술의 가장 절대적인 제일보(第一步)이다. 그러나 물상의 모방은 내면의 미와 교섭이 없더라도 달리 행하여진다. 미로 한다든지, 추로 한다든지, 그러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진으로 간주하며 모사하고 보는 본능의 통성(通性)이다. 단지 모사하는 본능과 자연물에 의해 유발된 내면의 미(또는 장식)가 일치할 때 예술이 기인(起因)하게 된다. 이 모방성과 자연물에 의해 유발된 내면의 미가 일치하고, 그것이 유기적으로 살아나면 사실의 길이 열린다. 모방성의 섬세함은 보는 것으로 현실에 입각한 미를 보다 깊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여 표현하는데 있어서 이 모방성과 장식성을 유기적으로 서로 살려 혼연하게 하나가 된다.
어쨌든 사실의 기인(예술의 기인이기도 하지만, 예술의 기인에는 장식의 본능이 있다. 사실이라는 ‘길’이 특수한 기인)은 모방성에 있어서, 특히 예술이 그 방향으로 빠져서 기술에 교묘하게 도취해 사실과 똑 같은 표현을 추구하게 된다. 실물을 똑같이 그리는 것은 화가에게는 상당히 큰 유혹이다. 실물처럼 그리는 것은 좋지만, 똑 같다는 것에 도취되기 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