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 미학산책] 예술미의 발견
근자에는 반미적 예술을 외치며 미적 차원의 극복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면 총서(시학과 해석학)의 『미적이지 않은 예술-미적이지만 한계현상』〈H·R·야우스편, 1968년〉에서 전형적으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액추얼(actual)한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예술로부터 미나 미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고 예술과 그것들과의 정당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미를 보편적으로 타당하도록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만을 시도하면 그것은 불모(不毛)적인 결과가 된다. 오히려 미를 역사적 현상으로 볼 때, 예술과 미는 밀접하다고 생각할 때, 또는 예술작품을 미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는 태도는 결코 초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며 광의적으로 근대에 있어서 처음으로 자명한 진리의 하나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술미라는 것이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역사적 조건에서 성립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근대예술관 성립의 질문과 중복된다고 생각된다.
근대미학의 성립은 일반적으로 미학의 명명자 바움가르텐(Baumgarten)이나 칸트(Kant), 혹은 괴테로 대표되는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에서 요구된다. 예를 들면, 1932년에 출판된 에밀 우디츠의 『미학사』는 근대미학 및 예술학의 성립을 18세기의 계몽주의로 보고 있다.〈E Utitz sthetik, 192〉 단, 그의 『미학사』에서는 3세기부터 17세기 사이, 즉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가 결핍되어 있다. 가다머는 칸트 미학에서 근대미학의 원점을 보는 한 사람이다. 확실히 칸트의 『미적판단력비판』은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직관적 판단의 정당성이나 미적 체험의 초월론적인 주관적 구조를 이론적으로 기초를 확고히 하고 예술과 미적인 것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밝혔다. 또한 칸트에 있어서 미적이지만 의미는 공통감 개념으로 볼 수 있어서 사회적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 그 주관 내재화와 함께 순수화·추상화·형식주의화가 강해졌다. 가다머에 있어서 이렇게 예술작품을 미적으로 관조해 평가하는 태도야말로 근대 특유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예술과 미와의 관계는 한층 넓은 역사적 시점에서 바라 보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그 기본적인 의미가 밝혀지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고대·중세라는 큰 시대 구분과 비교하여 광의적으로 근대를 생각할 때 처음으로 근대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 예술과 미와의 특유한 관계로 들어나게 된다.
예술미라는 개념은 초기 이탈리아·르네상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미와 예술을 고대·중세에서는 각각 생각했지만 르네상스기에 양자가 처음으로 결합되었다는 사고방식은 Perpeet, Beaumler, Panofsky, Tatarkiewicz들의 미학사에서 볼 수 있다. 이 소론을 쓸 때 위의 저자들을 참고 했다.〈A. Beaumler, sthetik, 1934, A. Panofsky, Idea Ein Beitrag zur Begriffsgeschichte der tteren Kunsttheorie. W. Tatarkiewicz, History of Aesthetic 111. Modern Aesthetics, edited by D. Petsch, 1974.〉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와 조형예술(회화·조각·건축)이라고 말하는 원래 상이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르네상스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예술가는 미의 주인, 미는 예술가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생긴 것이다. 미학사를 개관(槪觀)해 보면 고대·중세를 통해서 미와 조형예술을 원칙적으로 무엇인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따로따로 문제 삼아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미는 원래 지극히 드문 현상이며, 초월적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진·선과 함께 가치목표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조형예술은 원칙적으로 목수나 미장이와 같은 장인적 기술과 동열(同列)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는 원래 예술의 본질에 속한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예술은 미를 목적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예술=미라는 등식은 초역사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르네상스가 되어서 처음으로 예술과 미는 하나의 교의(敎義)에 결부시킬 수 있어서 20세기 초두까지 예술=미라는 등식이 예술애호가나 전문가의 사이에 거의 자명하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초기의 낭만주의나 헤켈의 관념론에 있어서 예술미야말로 최고인 미이다. 예술 이외에는 자연스럽게는 참된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까지 첨예화된 것이다.〈Vgl. k. W. F. Solger, Vorlesungen der sthetik, 1829, S. 1-5〉
한편 유럽의 미술사를 개관하면 주지와 같이 지오토(Giotto) 내지 마사치오의 회화는 그 이전의 고딕 또는 비잔틴풍의 중세 회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근대 리얼리즘의 투명을 고하고 있다. 이 새로운 회화이념은 19세기 후반의 모네나 세잔에게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연속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이하 주로『예술미-이탈리아·르네상스에 있어서의 그 기원』 (Das Kunstschne Sein Ursprung in der italienischen Renaissance, 1987)에 근거하면서 예술미 개념의 발견과 근대예술관 성립의 상황을 1. 《조형예술가》(알베르티, 레오나르도), 2. 《인문주의자의 미학》(페트라르카), 그리고 3. 《후원자의 미학, 혹은 피렌체의 정치·사회풍토》의 각 절로 나누어서 밝혀 간다. 왜냐하면 이 3자의 협력에 의해 처음으로 예술미 개념이 발견되어 충실한 내용으로 광의적인 근대 특유의 예술관의 기초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