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현대’라는 용어는 시간과 공간 외 역사와 물질적 경계에서 발생되는 의식을 인식하는 좌표가 되거나 중심이 된다. 현대는 시공간에서 최상의 위치에 있으며 과거로 부터 분리되는 새로운 개념이다.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나’ 의 ‘현실적‘ 시대가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현실과 현대는 자칫 혼돈할 수 있지만 ‘나’ 가 주체인 현실 속에서 현대는 이해 하기 어려운 심해속 본적없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 예술에 있어 현대미술을 지식으로 접근하거나 의식의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는 오류때문에 현대미술은 자칫 동시대에서 쏟아져 나온 것으로 착각하거나 다루기 힘든 폭발물이 되기도 하여 터부시 되는 사례가 많다. 

현대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개인적 사고를 논하기도 하지만 모두 오류로 폐기되는 경우를 경험하였다. 현대를 이해하는데 과거 근대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허리둘레를 재는 재단사 처럼 행위를 하나 현대는 허리가 없고 길이가 없다. 도리어 현대를 경험하려면 미래 도시를 상상하거나 불가능한 것이 현대라고 정의하는 것이 명확할수 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현대의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않은 그 너머에 현대가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

2024년 금보성아트센터 기획 '구명본,한국현대미술 발언전'
2024년 금보성아트센터 기획 '구명본,한국현대미술 발언전'

구명본 작가의 작업은 근대라는 포구에서 닻을 올려 현대라는 바다를 향해 항해하려한다. 최근 발표한 ‘무위’의 세계가 무엇인지. 근대의 침대에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그에게 현대라는 생명체에 이식되어 현대라는 심장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교감하는 꿈에서 깰 것이다. 

구명본 작가가 근대 동굴 속에서 갇혀 있지 않고 천천히 동굴 밖의 현대를 접속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근대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배신이며 죽음 뿐이다. 그가 선택한 현대는 신기루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 하지 않았다. 현대는 시공간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종교의 신과 같으며 보이지 않지만 진행 중이다. 우주를 유영하는 인공위성의 존재처럼 개인적  현대와 조직의 현대는 조금씩 기능이 다를 수 있어도 본질은 같다. 

구명본 작가가 떠 다니는 무수한 생각들과 접속한 것을 하나씩 캔버스에 올려 놓는다. 무덤속을 도굴하듯 보이지 않은 무형의 세계에서 건져내는 현대라는 심해 생물을 캔버스에 올려 놓는 것은 이미지 포착이나 형상적 생각이나 경험된 덩제된 지식의 투망질이 아닌 자유함이다. 진정한 자유함이 현대라는 바다 위 유영할 수 있었다. 

최근 구명본 작가 작품에 질서도 없고 꾸밈도 없다.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깨지고 망가지고 부서져 버린 것들 속에 자유함이 상처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여유롭고 단단하다는 것을 감지되었다. 보는 법을 배우면서 의식이 발전한다. 보여지는 표시들은 하나의 현실을 제시하는데, 우리는 보는 과정을 거쳐서 인식에 도달하고 이 인식을 가시화할 수 있다. 보는 것은 창조성을 발동시키는데 이것이 예술에 있어 창작이며, 진정한 자유라고 한  로베르트 호이서에게 현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현대는 자유함이고 모방된 창작이 아닌 절대적 고유성을 가진 생명체의 심장이다. 작가에게 현대라는 심장은 창작의 엔진이다.

구명본 작가는 무의식에서 탈출이 아닌 의식에서 탈출하는 것이 더 어려운 고통이다. 관조적 저장된 기억을 탈탈 털어 버리는 것이 현대를 찾는 키워드라는 것을 경험하였다.

2024년 금보성아트센터 기획 '구명본,한국현대미술 발언전'
2024년 금보성아트센터 기획 '구명본,한국현대미술 발언전'

현실속에 존재한 이들이 모두 현대라고 생각하나 실은 착각속에 깨워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다. 그래서 어두운 암흑의 출구가 없는 동굴에 갇혀 있다. 역사의 퇴적된 구상적 이미지 내음을 쫓고 사는 작가들이 울타리를 만들고 경계를 돈독히 하면서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이러한 줄에 매달려 사는 것이 예술이 아니란걸 알면서 ‘나’라는 현실 속 존재감의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계보가 되고 미술사가 되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과거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현실과 현대라는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순환되는 역사에 탑승하였기 때문이다. 무덤 속에 잠자는 사람들이 구축한 것을 모방하고 재현해 내려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창작이 아니기에 현대 작가 되기를 진정으로 기억했으면 싶다.

변화를 두려워한 작가들은 박쥐처럼 동굴 속에 갇혀 누군가를 탓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구명본 작가의 의식은 불패 청년이다. 동굴속 박쥐로 살고 싶지 않아 힘껏 밖으로 나왔다. 부산 작업실 방문때 마다 실험과 작업 방향에 대한 진정성은 자칫 그동안 추구하던 것을 망가뜨릴 수 있었음에도 두려움이 없는 청년의 생각이다.

에콜 드 프랑스의 ‘황태자’로 불려지는 니콜라 드 스탈은 그의 작업 일기에 ‘나는 나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언제나 다르게 미리 주어진 미학 없이 작업해야 한다.’ 드 스탈은 ‘형태들을 색채의 유희 속에 풀어놓으면서 오히려 평면과 공간의 깊이를 명확히 하려 했다. 그에게 사물은 공간 자체보다 덜 중요해 보였다. 또 스탈은 사물들보다 공간이 더욱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예술이란 붓의 유희며 붓의 중심으로 살았던 작가들이 모두 근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무조건 땅굴 파듯 그리는 것이 원칙이라 생각하는 동굴속에 갇힌 작가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구명본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작품에 대한 인식과 관심은 작가만이 아니라 관객 모두 바뀌었다.

근대에서 이탈은 탈선이며 죽음과 같다.

구명본 작가에게서 현대미술에 대한 혜안이 열리고 있다는 것은 의식의 내부 지진과 같은 균열로 오랜 전통과 관습이 깨지고 있었다. 구명본 작가는 주저하지 않고 붓을 버렸다. 치과에서 사용하는 스케링 머신으로 소나무와 까치를 발굴했다.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에 그리는 작업이 아니라 숨어 있는 유물을 조심스럽게 발굴하듯 캔버스에서 종일 땅을 파듯 긁어내면서 유물의 지경을 확장했다. 

오래전 그의 작업이 얼마나 교과서적인가. 그 교과서적인 관념을 스스로 허물고 새롭게 완성되어 가는 또 한번의 시도는 계속 대담해 지고 있다. 캔버스 마다 자유롭게 물감을 투척했다. 그동안 도공처럼 도자라는 유연한 가공된 선을 깨뜨리는 순간 다시 돌아 가고자 하는 길을 지우기 위해 붓을 놓았다. 

로버트 야콥센 (Robert Jocobsen)은 ’내가 무엇을 작업하든지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릴 때에도, 나는 가장 단순한 도구를 가지고 가능한 한 가까이 ‘나 다운 대상’에 접근하고자 노력한다. 나는 이 재료에 정신을 불어 넣으려고 시도하였다. 나의 작업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변증법에서 발생한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해야 할 일과 그를 위한 영감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작품들은 새로워야 한다. 나는 나의 새로운 형상들을 나의 추상적 형식들과 같은 방식으로 고안하였다.‘

구명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조금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작가로서 용기를 가지고 작업을 선보인 것 자체가 귀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현대작가로서 구명본 작가의 발언은 소리가 아닌 내적 자유함에서 터져 나온 샘물과 같은 창작이 현대를 대변하기에 기대를 갖는다. 새로운 한국미술의 대변자로서 그 무위의 놀이를 함께 즐겼으면 싶다. 

금보성

한국예술가협회 이사장
금보성아트센터 관장
백석대교수 
시집7권 
개인전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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