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물조차 생명이 있다는 자연예찬의 결실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무기물조차 생명이 있다는 자연예찬의 결실 -

朴 明 仁(미술평론가·한국미학연구소 대표)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미적 체험이 선행된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인 무가치한 결과로 전락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화가는 자연대상이나 자연의 광경 또는 인공의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감각적인 미질(美質)을 감지하고 기술적, 정신적, 감각적, 지적인 다층적 이해와 역동적인 프로세스에 의해 구축물을 완성해 나간다. 미적(aesthetic)이라는 말은 원래 감성적인 의미에 있어서 창작적인 활동과 대립하게 되지만, 반면 미적 체험의 다층성은 이해를 충실히 함으로써 소유하려고 하는 정신의 지향성이 있다. 사람에게는 이 같은 우주와도 같은 광대한 정신세계가 있어서 여기에서 표출되는 미가 내면의 미라고 할 수 있으며 내면의 미가 없이 좋은 미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내면의 미에 의해 구상(具象)되고 조형화된 하나의 현상(現象)이 바로 창조적 미이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류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고, 원망(願望)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된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이러한 논리를 유추해 볼 때 평소 유재민 선생의 과묵한 성정은 외향적이지 않고 내적인 사유가 심대해서 내면의 세계가 존재하고, 남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학적 의미에서의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는 테마는 바로 질료와 색채의 조화에서 기초를 세워 정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칸트가 말한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동조화(遊動造化)’이다. 화가가 새로운 것을 해 보겠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것을 내세우다 보면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유재민 선생은 질료에서 샌트페이퍼(沙布)를 선택했고, 색채에서는 적색을 강조하는 국한적인 선택으로 오류를 벗어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휘했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그러나 유재민 선생의 작품을 분석하고 거론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생존 화가는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기 때문에 직면해 있는 현실을 표현하면 되지만, 고인과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어서 어려움이 있고, 더 이상 변화가 불가능한 불변의 작품을 분석 거론해야 하므로 객관성보다 평자(評者)의 주관에 의해 거론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행히 유재민 선생하고는 오래전부터 유대가 있었다. 한국미술협회 평론 부이사장 재임 시 미술인의 날 대상에 추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재민 선생이 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이 상은 원로작가상보다 우위에 있는 상이라서 미술인이라면 가장 큰 명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연수구청 갤러리에서 전람회할 때 짧은 단평을 쓴 적이 있고, 차제에 팔순전을 하면서 정식평론과 화집 출판을 하기로 했지만 코로나 펜데믹으로 무산되었고 뜻하지 않은 병고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사람이 하는 일이나 계획이 뜻하지 않게 좌절되는 일이 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에 와서 아드님과 자부 이태영 씨가 유작전을 준비하면서 연락이 왔다. 자부 이태영 씨와 장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유재민 선생이 자리에 배석하지 못해 작품에 대한 대화는 나누지 못하고 비록 주관적이지만 내 나름대로 과거를 돌이키면서 글을 쓰기로 하고 필을 들었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유재민 선생의 작품은 독창성이 있다. 전술에서 두 가지 언급한 것 중에서 질료로서의 샌트페이퍼를 들 수 있다. 보통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지만 유재민 선생은 매우 거친 샌드페이퍼(Sandpaper)에 그림을 그렸다. 사포(沙布)라고도 하는데 금강사(金剛砂)나 유리가루, 규석(硅石) 따위의 가루를 발라 붙인 천이나 종이로써 쇠붙이 따위를 닦거나 문지르는 데 쓰인다. 그런 만큼 매우 거칠고 강력하다. 생전에 그는 이 샌드페이퍼에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만큼 붓이 많이 소모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 왜 유재민 선생은 샌드페이퍼에 그림을 그렸을까?

여기에는 질료에 대한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남다른 재료에 의한 아이덴티티( identity)가 첫 번째 차별화이다. 이것은 평생을 해 왔듯이 변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성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고유한 존재가치를 조출(造出)하기 위한 개성표출이었다. 자신이 화가로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정착시키기 위한 소신이었다. 둘째로는 색채에 대한 의식이었다. 연수구청 갤러리에서 전람회할 때 직접 들은 말로는 음양오행설의 오방색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방색은 실재로 어두운 색감이라서 유재민 선생의 작품이 오방색의 적색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논리적으로 오방생의 적색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오방색의 의미만을 도입한 것이다. 이 오방색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철학으로서 누구나 생활에 많은 관련이 있는 색으로 정착해 왔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이 오색(五色)은 결국 수많은 색을 의미한다. 일단 오색이라고 하는 것은 양기(陽氣), 음기(陰氣), 풍기(風氣), 회기(晦氣), 명기(明氣)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유재민 선생은 강렬한 적색을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거친 샌드페이퍼의 거친 표면에 의한 오기(五氣)를  표현했다. 이 오기란 중앙과 사방의 기를 의미하며, 비오고, 볕 나고, 덥고, 춥고, 바람 부는 다섯 가지 기후조건이 함유되어 있다. 인체로는 다섯 가지 기운, 즉 차고, 덥고, 바람기가 있고, 속이 타며, 습기(濕氣)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하는 화의(畵意)는 한국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겠다는 의지이며 동양적인 선, 색감, 재질, 테마 그리고 서정적 자연주의 경향으로부터 자연의 생기운동의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적색에 대한 인류의 해석은 다양하다. 적색은 인간을 흥분시킨다. 또한 중국에서는 악귀를 물리친다고 해서 적색을 선호한다. 그러나 유재민 선생이 적색을 많이 사용한 것은 적색이 인간의 심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태양의 불멸의 열과 무한한 에너지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유는 생명력으로 부각되었다.

유재민 선생의 화실에서 본 문드러진 붓들과 같이 그런 만큼 작품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다. 색에 의한 형상기세는 회화적 생명력을 하나의 정상(情狀)으로 표출했다. 작품의 형상기세가 물체의 구체성은 물론 정태(情態)가 있다. 인간의 정신의 형체는 물체로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한 정태, 즉 정신의 미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점의 작품의 정태를 인지하면서 관자(觀者)는 미적 요소를 감지하고 유재민 선생의 의식을 이해하게 된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결과적으로 유재민 선생의 개성표출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이란 물리적으로는 분할이 가능하지만 인간의 개성이란 인디비주얼(individual)이다. 이를테면, 분할이 불가능한 개개인의 독보성이다. 아직 샌드페이퍼를 사용하는 화가는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적인 개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실의 존재는 불변하며 유재민 선생의 질료나 색채는 불변의 형태을 갖추고 있어서 개성표출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한 사상적(思想的)으로는 물질을 단순히 생명이 없는 무기적(無機的)인 것으로 보지 않고 물질 자체에 생명이나 영혼이 있다는 물활론적(物活論的)인 사유가 내포되어 있다. 사포의 질료적인 특성과 색채에 대한 오행사상 논리, 물활론적인 사유가 상합되면서 작품성을 귀결하게 된다.

특히 유재민 선생이 화가로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내조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 유년기부터 친구로 시작하여 아내로서 반려자가 되고, 몰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뇌를 함께 딛고 일어서면서 우뚝 서게 한 것이 바로 내조의 힘이었다. 교육자로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붓을 놓은 적도 있었지만 아내의 독려로 다시 붓을 잡아 그림 그리는데 전념하였다. 주변의 어느 원로화가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화가는 보지 못했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내조의 힘은 자녀교육에도 성공하여 모두 당당한 사회의 뛰어난 역군이 되었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변의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사랑도 자녀들의 효성도 뒤로 하고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은 매우 유감(遺憾)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자연의 물활론적 유동조화 '유재민 회고전 '

그러나 교육자로서의 덕망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노자의 도덕경에 의하면 무위자연적인 도(道)에 자생한 덕화(德華)를 덕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자연계의 만물을 스스로 자라게 하고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유재민 선생의 작품과 비유된다. 작품을 조출(造出)하면서 강제적이지 않고 자생적이며 향락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자연적인 순수가 있고 모든 여건이 즐거움으로 동화(同化)되어 순화적인 힘이 상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심미의식이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자연의 자연성에서 비롯되는 이치로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이 관계되는 직관(Intuition)과 감응(Affrection)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이 미적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수려한 명산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자는 부동적인 것에도 생명이 있다고 했지만, 자연의 물체가 형상기세에 의한 동적인 것은 모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감지할 때 미는 존재하게 된다. 끝으로 대부분 평론에는 화가의 직함이나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가와 작품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화가도 작품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다만, 작고화가로서 그의 덕망과 유작에 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존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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